2010-08-02 오후 5:19:33 입력 / 2010-08-02 오후 6:15:10 수정
S#1. 우리는 제천으로 간다
7월의 마지막 주말은 피서 철의 클라이맥스. 영동고속도로와 38번 국도가 극심한 정체라는 뉴스가 이른 아침부터 흘러 나온다. 오후 2시부터 청풍명월 바둑축제가 시작되는데 과연 이런 최악의 교통여건 속에서 행사가 열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필자는 타이젬에 연재되는 소설 [낭만기객] 독자들로 이뤄진 팀을 구성해 참가신청을 했고, 선수단과 함께 10시에 일산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겨우 박달재 부근에 이르렀고, 청풍명월의 학현계곡 대회장에 도착한 시각은 4시 15분. 그 사이 무수히 전화벨이 울렸고 동서남북에서 제천으로 달려오는 기우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도로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지점으로 천천히 모여드는 그 열정의 느린 행마들이 눈물겹다. 금수산 계곡 도로 양쪽으로 전국 각지의 번호판을 장착한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눈짐작으로 헤아려도 백 대는 넘어 보였다. 만나는 기우들마다 교통정체에 치를 떨면서도 환하게 웃는다. 부산에서 다섯 시간, 광주에서 다섯 시간 반 걸렸다고 한다. 인천이나 일산 쪽에서 온 팀들이 훨씬 더 고생한 셈이다. 계곡으로 걸어 들어가니 사방에 바둑판이 깔려있고 34개 팀 멤버들이 각자 팀의 이름을 걸고 열심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학현계곡은 제천팔경에 드는 명승지로 금수산 신선봉에서 발원한 계곡의 수량이 풍부하고 숲이 울창하며 송이버섯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 학현마을 주민들이 개발하고 관리하는 아름펜션이 바로 청풍명월 바둑축제 현장이다.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말 그대로 대회가 아니라 바둑을 사랑하는 이들의 큰 잔치로 치러진다. 그렇기에 냉혹한 승부보다 따뜻한 수담이 우선이어서 기력에 따라 치수가 적용된다.
▲ 낭만기객 팀과 청풍명월 팀의 대국 모습.
공식기력은 타이젬 단수가 적용되고 그에 따라 치수가 주어진다. 3단이 9단에게 6점을 깔고 두니 중하급자들이 두려움 없이 한 판 즐길 수 있는 자리다. 단체전 우승이야 가장 승점을 많이 올리는 팀에 주어지지만 개인전 우승은 최하위 팀에서 4승을 올린 개인이 차지한다.
S#2. 淸風도 없고 明月도 없지만 낭만은 넘치더라
축제 첫날 공식 2차전이 끝나고 마련된 리셉션.
해가 거듭될수록 이 바둑축제에 바둑애호가들의 참여가 확산되면서 제천시의 관심도 커졌다고 한다. 적지 않은 금액을 희사하고 제천시민들도 자발적으로 나와 교통정리와 음료수 서비스를 했다. 저녁식사 메뉴는 통돼지 바비큐와 송이버섯 토종닭 백숙. 송이의 향이 배인 백숙은 부드러웠으며 바비큐는 고소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와 오이짠지도 맛깔스러웠다. 통돼지는 사실 단체전 우승 팀에 주어지는 부상인데 항상 전날 저녁 메뉴로 가불해 나눠 먹는 전통이 있다.
▲ 1, 2등팀의 상금인 돼지 한 마리와 송이백숙은 대회 첫 날 저녁 메뉴로 올라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축제라서 교통, 잠자리, 먹 거리 등 불편한 점이 없을 수 없지만 누구나 그러려니 너그럽게 웃으며 감싸준다. 제천바둑협회나 기획자 임창순 사범, 진행을 맡은 A7 팀 뿐만 아니라 참가자 모두가 주최자이기 때문이다. 밤이 되자 계곡에 사람들이 가득 찬다. 약간 흐린 날씨라서 하늘은 어두웠고 바람 한 점 없어 청풍명월이 무색한 밤이었다. 그러나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바둑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병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 대회보다 더욱 치열했던 7:7 대국.
불빛이 환한 제1대국장의 인구밀도가 높아 찾아가봤더니 이색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A7(아마 7단)으로 통하는 아마 최정상급 기사들에게 5~6단급 기객들이 정선으로 한판 뜨자고 도전한 것. 그래서 7:7 대국이 성사됐고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는 내기상금이 걸렸다. 아마추어 농심 배 단체전쯤 되는 빅 이벤트인 셈이다. 그런 분위기가 모든 펜션으로 번져 여기저기서 다양한 대국이 펼쳐졌다. 강원도 인제군 대표로 참가한 [내린천] 팀과 [광주빛고을] 팀은 같은 방에 배정된 룸메이트였다.
최북단과 최남단 팀이 우연하게 한 방에서 만난 것. 양 팀이 상견례를 나누더니 이부자리를 깔기 전에 5:5 단체전을 하기로 의견을 모으더니 곧장 나란히 병렬해 1장부터 5장까지 오더를 짜고 자정이 넘도록 수담을 나누었다.
“봄에 광주로 초청할 테니 가을에 인제로 불러주세요.”
“아! 좋은 생각입니다. 무조건 콜!”
그렇게 남과 북의 기객들이 정을 섞는다. 일일이 모든 펜션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모든 방에서 그런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으리라.
▲ 우승을 차지한 의정부 팀.
S#3. 가장 긴 시상식
청풍명월 바둑축제 시상식은 국내 어떤 바둑대회보다 시상식이 길다. 승점에 따라 1위부터 4위까지는 정식으로 시상하지만 그 뒤부터는 복불복 행운이 좌우하는 시상이 이어진다. 의정부 팀이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고, 개인전 우승은 부산 샛별회 멤버에게 돌아갔다. 빛고을광주팀이 ‘최장거리’상을 받았다. 가장 먼 거리에서 참가한 팀에 주어지는 타이틀인데 상품이 우승 팀보다 푸짐하다. 그 상은 항상 부산 팀이 독차지했는데 이번에는 부산 팀에서 광주 팀을 위해 양보했다.
▲ 즐거워 하고 있는 참가자들.
주최 측에서 다양한 상품을 협찬 받아 골고루 안배하는 시간이기에 시상식 겸 폐회식은 계속 박수로 이어졌다. 대회가 끝나자 학현계곡은 돌아가는 바둑인들의 차량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두 차창을 내리고 손을 흔든다.
“내년에 또 만나요!”
핸들을 잡은 이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이를 악문다. 돌아가는 길은 또 얼마나 밀릴 것인가? 공교롭게 가장 피크인 피서 기간에 일정이 잡혔지만 청풍명월 바둑축제에 참가한 기객들은 투덜거리지 않는다. 이 번거로움을 견뎌내고 즐긴 바둑과 바둑 친구들의 기억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학현계곡을 품은 제천은 한반도의 중심인 배꼽에 해당된다. 아마 바둑인들의 열정을 품은 청풍명월 바둑축제는 진정한 바둑 광들의 열병식이다. 그러므로 그곳이 바로 바둑계의 배꼽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