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젬게임

기획기사

철 지난 河國手와의 대화

지난 4월에 나눈 마지막 인터뷰

2010-09-14 오후 1:26:25 입력 / 2010-09-14 오후 3:00:02 수정

화요일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 메신저를 켜자마자 한통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하국수님 별세하셨어요.”

한국기원 홍보실에서 보내온 메시지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너무도 건강한 하국수의 모습을 확인했기에 참으로 먹먹했다.

“그때가 마지막으로 병세가 호전되었을 때였나 봐요.”

중국에서 궁륭산배를 취재 중인 타젬 김지은 기자가 한마디 보탠다. 김기자와 필자는 바둑기자로서는 가장 최근 공식 인터뷰를 한 사람일 것이다.


▲ 하찬석 국수는 비씨카드배 결승2국 이세돌vs창하오 대국 입회인이었다. 한국기원 3층 기자실에서 위빈 9단, 진재호 바둑평론가 중국혁성 이철용 대표와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앞줄 오른쪽)

그날 하국수는 굉장히 건강해보였다.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혈색이나 풍채로 봐도 5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말끔한 정장 차림의 댄디한 멋쟁이 중년신사였다.

4월 25일 일요일이었다. 제2회 비씨카드배 결승 입회인으로 ‘합천거사’ 하찬석이 건강한 모습으로 한국기원에 와 있었다. 그가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얘기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씩씩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몹시 기뻤다. 그의 근황과 다시 찾은 건강에 대해 갑자기 아무 말이든 하고 싶어진 것이다.

경상도 사람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하던 하국수와의 대화는, 그러나 타이젬 어디에도 실리지 못했다. 바둑사이트의 특성상 한번 놓쳐버린 기사(記事)를 다시 실을 기회를 찾기가 어려웠다. 당시 현역으로 복귀한 이세돌이 콩지에를 이기고 세계권좌에 올랐던 뉴스가 워낙 휘발성이 컸었다. 그러다 오늘에야 부랴부랴 철 지난 하국수와의 대화를 담는다.

- 얼마 전까지 몸이 굉장히 안 좋았다고 들었는데요.
직장암에 걸렸었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증상이 있는지도 몰랐어. 06년에 딴 일로 병원에 갔다가 암에 걸린 걸 알았지. 병원에서 살기 힘들다고 그랬어. 길어야 6개월이라고. 김수영 사범, 임(선근)총장도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제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 그런데 이렇게 생생하다니 그야 말로 천우신조지. 틀린 말을 한 의사가 그렇게 고맙더군.

- 지금은 굉장히 건강해 보이는데, 완쾌된 건가요.
많이 좋아졌지. 민간요법도 하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먹고…. 무엇 때문에 나았다고 딱 한 가지 이유를 말할 수는 없어. 매일 산에 올랐는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지. 기분으로는 다 나은 것 같아. 병원에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가는데 최종 검사는 내가 조금 더 좋아지면 받는다고 했지. 요즘은 종종 입회도 하는 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겠지.

- 지방에서 거주하고 계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79년에 서울 개봉동에 살다가 고향인 합천에 내려갔지. 당시 한창 성적 낼 때였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합천에 계셨어. 그래서 막내인 내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가족들이 대 이동을 한 거야. 지금이야 세계대회도 있고 기전이 꽤 많지만 당시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 않았어.

- 기전이 몇 개 없었어도 그 때 성적이 좋아 시합이 많았을 것 같은데, 다시 서울에 올라올 생각은 없으셨나요?
그래서 1년 반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지. 합천에 내려오면서 서울 집을 팔고 지인의 권유에 그 돈으로 주식을 샀었거든.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글쎄 1년 반 동안 주식은 제 값이고 그 사이 서울 집값은 4~5배나 올랐지 뭐야? (웃음)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그만 서울 입성할 기회를 놓친 거야. 4~5배 오른 가격에 집을 사기는 싫잖아?

- 먼 거리 때문에 있었던 에피소드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79년 왕위전 국수전 도전기를 치를 때 도중에 기권한 적이 있었어. 당시엔 한국기원 대국 스케줄에 불만이 있어 그랬어. 조(훈현)국수와 10번 승부를 하게 됐는데 기전 일정이 3일에 한 판으로 잡혀있는 거야. 3개월 동안 대국이 하나도 없다가 (도전자 되고 나니까) 대국이 밀려 버린 것이야. 당시 합천에 거주하던 나에겐 지라는 이야기밖에는 들리지 않았지.

또 공교롭게 두 기전 모두 0-2로 밀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두다가는 너무 허망하게 끝날 것 같았던 거야 그래서 왕위전 3국을 기권하고 1주일 뒤 열리는 국수전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지. 난 그때 정말 순수하게 승부를 위해 기권했던 것이야.

그런데 난리가 났어. 당시 도전기 인기도 엄청난데다가 두 기전 스폰서가 중앙 동아이다 보니 더 난리가 났어. 두 신문사가 라이벌이었거든. 기사총회도 열렸지. 지금으로 치면 이세돌 파동쯤 되는 것인가. (웃음) 그때는 기전이 5개인데 바둑도 지금보다는 훨씬 우대받을 때이기 때문에 대서특필감이지. 도전기를 기권한 첫 사례였지.

그 이후에도 86년까지 상당히 성적을 냈는데 그때도 왔다 갔다 하긴 했어. 그때 주식 투자한 게 철천지원수였어.(웃음) 그런데 그게 묘하게 운명처럼 되어버렸네. 86년도까지 기회를 만들어서 서울로 갔어야 하는데…. 지방에 있으면 성적을 못 내지.


▲ 지난해 11월에 열린 덕영배 아마대왕전에서 어린이부 시상을 하기 위해 참석한  하찬석 국수. 

- 조국수와의 번기에서 패배해서 홧김에 낙향했다는 소문은요?
말도 안 되는 거야. 사실관계에서 벌써 틀렸어. 난 내려가서 도전자가 된 거야. 내가 결혼한 해에 76년도에 국수를 뺏겼는데 그 해 내가 결혼한 해거든 79년도에 다시 국수와 왕위를 도전했거든. 처음으로 도전한거지. 당시에는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스케줄 때문에 이상하게 된 거야.

- 조국수에게 지니까 몹시 열 받으셨겠네요?
당시 조국수에게 지고 싶은 마음 전혀 없었지만, 이상하게 승부욕은 안 생겼어. 다른 사람 같으면 쉽게 안 내줬을 거야. 난 조국수 김(인)국수 중간인데 난 라이벌이 없었어. 조국수에게 국수를 뺐길 때와 윤(기현)국수에게 뺐을 때의 자세하고 많이 달랐어.

조국수가 9살 때 나는 조국수에게 바둑을 배운 사람이야. 많이 늦었지. 맨 처음 난 연구생 5급이었는데, 당시 조훈현은 9살 꼬맹이였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형이니까 힘으로(?) 끌고 와서 몇 판씩 배웠다니까. 그러다가 일본을 같이 갔잖아. 도장은 달랐지만 매주 연구생에서 바둑두다보니까 동생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국수전도 꼭 이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

- 전성기가 좀 짧았는데 아쉽진 않나요?
아쉬움은 있지.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국수는 강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조국수가 좀 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파링파트너 역할을 잠시나마 해 준 것이 나의 역할이랄까? 한국바둑에 미천한 거름역할은 하지 않았나 생각해.


                ▲ 1976년 8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하찬석 vs 조훈현 대국 기사

- 요즘 젊은 프로기사들에게 현역에서 한 발 물러난 선배로서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옛날부터 느꼈는데, 프로기사들이 걸어온 길 과정들이 나와는 조금 달라. 난 서당 다니고 한문 공부하고 서예하고, 일본을 건너가서 도장에서 바둑을 배우면서 인생 공부를 했다는 게 요즘과는 다르다고 생각해.

아쉬운 점은 인생의 프로로서 바둑을 잘 둬야 되는데 그게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요즘 애들이 빨리 성장하고 경쟁하니까 현실적으로 힘들진 않나 싶어. 그땐 입단 나이도 늦고 인생 알기도 전에 입단하니까. 너무 실력 하나로만 가는 경향이 너무 아쉬워. 개인적으로, 프로기사에게도 큰 손해일 거야.

- 입단 즈음 얘기 좀 해주세요?
난 특이한 게 일본가기 1년 전인 63년도 봄에 서울로 올라와서 12월에 일본에 갔어. 입단후보들에게 두 점 치수였지. 그런데 1년 사이에 그 갭을 다 따라가 버렸어. 유학가기 전에 첫 입단대회 나갔는데 3등을 해버렸어.

당시 정동식 백흥수 씨가 입단했는데 원래 나는 두 점 놔도 안됐어. 근데 몇 달 전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해버려 6개월 사이에 두 점이 늘어버렸던 것이야. 그 때 입단했으면 큰 일 날 뻔했지.(웃음)

입단대회 시드를 받은 상태에서 일본에 갔는데, 64년에 일본연구생 테스트에서 5급이 안 되는 거야. 이미 조국수와는 연구생 4급때 두어보았는데 판이 안 되었지. 결국엔 역전을 시켰지만 말이야. 그래서 연구생 5급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조치훈은 8급, 조국수는 3급이었어. 1년 사이에 내가 4,5급이 는 거야. 결국 조훈현과 고바야시와 같이 입단했지.

- 일본을 어떻게 가게 됐나요?
사실 처음부터 바둑을 두려고 간 게 아니야. 그 당시에 일본으로 유학가기가 어려웠어. 그런데 삼촌 3명이 일본에 있으니까 시골에 있는 조카를 보면서 걱정을 한 것이야. 그래서 일본에 와서 공부하라고 해서 가게 되었지.

- 그럼 바둑을 통한 위장유학이었던 거네요?
그런 셈이지. 15세에 조국수한테 맨 처음 5점을 놨던 실력이었으니까 잘 뒀다기보다 제법 둔거지. 애초에 바둑으로 성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다만 조남철 선생님과는 관계가 좋으니까 선생님을 내세우면 일본행이 쉬울 거라 생각한 것이지. 우리 삼촌도 바둑은 몰라. 원래 계획은 기다니도장에 가지 않고 일본에만 당도하면 다른 공부를 하려고 했다니까.(웃음)

- 그런데 바둑의 길에 들어섰잖아요?
바둑을 전혀 도외시할 수는 없었어. 일본에 오래 머무르려면 일본기원 연구생증명서가 있어야했거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연구생 들어가서 일종의 ‘반수생’ 역할을 하면서 다른 공부를 하려고 했어. 거기서 가끔씩 바둑을 두어야 했지. 그런데 바둑의 매력 알잖아? (웃음)

2년이 지나서 삼촌들이 공부는 안하고 바둑만 둔다고 한국으로 날 데려가려고 했어. 기다니 선생 사모님이 당시 모범생이었던 나에게 호감이 대단했어. 제일 일찍 일어나고, 제일 늦게 자고 했거든. 가토, 이시다, 다케미야 등에게 내가 바둑 배우려고 청소해주고 설거지도 해 주는 등 엄청 노력했어.

사모님이 나에게 삼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책임지고 가르치겠다.’ 그렇게 약조해주셨지. 안 그랬으면 쫓겨났겠지. 그 때부터는 더 전념할 수 있었지. 난 바둑에 많은 애정이 있었지.

- 입단 에피소드가 있다던데요?
만 18세까지 무조건 해야 되는데 마지막 입단대회에서 내가 병이 난 것이었어. 정말 하루 3시간 자고 열심히 했고 입단한 실력이 되었음에도 마지막 입단대회에서 떨어졌어. ‘난 끝났구나.’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기다니 선생이 일본기원 이사회에서 입단대회 둔 기보 10국을 적어논 걸 제출해 일본기원 심사에서 준기사 자격을 얻게 해주었지. 1년 동안 프로들이 두는 승단대회에 성적을 보고 입단을 한거지. 묘하게 입단한거지.

묘하게 타고난 운명인 거지. 외국인한테 그런 기회를 어떻게 주었을까? 기다니 선생의 파워가 센 거야. 그런 이야기가 먹혀들어갔으니. 그런데 바로 2단으로 승단해버렸어. 고바야시 조훈현과 입단 동기인데 내가 먼저 8연승을 거두며 먼저 2단이 되어 버렸어. 아직도 난 초단 면장이 없어. 역시 바둑으로 프로가 될 팔자인가 봐. 입단과정도 그렇고.

- 역시 국수를 딸 때가 가장 기억에 남죠?
그렇지. 역시 우리 때는 국수야. 그것이 지금으로 치면 세계기전 우승한 것 같은 것이니까. 첫 국수 딸 때 4국이 가장 기억에 남지.

- 기사 생활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
별로 생각이 안 나네. 전혀 안 나.

- 다시 시작하는 인생에 대한 소회랄까…?
그 동안 몸이 아프고 나서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느꼈지. 내가 묻힐 산소도 내가 직접 가서 봤을 정도니까. 비명 같은 것도 다 받아놓고 누울 준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 그사이에 느낀 게 내가 그 동안 내 몸을 너무 혹사 시켰던 것이야. 술도 많이 먹고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거 같아.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안 살아야지. 나쁜 생각도 안하고. 욕심도 안 부리고. (마음을 비웠으니까) 굉장히 편안한 상태야. 지금은. 항상 느끼고 후회하는 게 내가 내 몸을 혹사시킨 것이 아쉬워.



제4대 국수(國手)를 역임한 하찬석 9단이 9월14일 오전 6시 11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1948년 경남 합천 생.

1963년 일본 기타니(木谷) 문하생. 일본기원 입단했다. 5단까지 승단.
1970년 귀국. 6월 한국기원에서 4단을 인정.
1973년 제18‧19기 국수전 2연패 등 우승 5회 준우승 14회.

‘가야산 도사’ ‘합천거사’ ‘무딘 칼날의 명검’ 등의 애칭으로도 불렸던 고인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 국기 왕위 국수 최고위 도전권을 모두 거머쥐며 당시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조훈현과 바둑 사상 초유의 20번기를 벌이기도 했다.

2003년 입신의 반열에 오른 고인은 대구, 경북지역 바둑발전에 평생을 헌신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영경 씨와 1남 1녀. 발인은 9월16일 장지는 경남 합천군 야로면 나대리 선산.
TYGEM / 진재호 바둑평론가

관련기사

SNS 간편로그인

(주)컴투스타이젬    대표이사:이승기    사업자등록번호:211-86-95324    사업자정보확인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315 파이낸셜뉴스빌딩 4층

제호: 타이젬    등록번호: 서울 아04168    등록(발행) 일자: 2016.10.4

발행인: 이승기    편집인: 정연주    청소년보호책임자: 장성계

전화: 1661-9699 (상담시간:10:00-18:00)    FAX : 070-7159-2001    이메일보내기

COPYRIGHTⓒ Com2uS TYGEM Corporation ALL RIGHTS RESERVED.

  • 타이젬 일본
  • 타이젬 중국
  • 타이젬 미국
  • 타이젬 대만

2019 인공지능대상 수상

등급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