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대국실에서 대국에 몰두하는 유창혁 9단.17일 밤 아홉시.
상암동 누리꿈 스퀘어가든 21층 타이젬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사무실 서쪽 구석 유리창 가에 자리한 온라인 대국실.
왕년에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유창혁 9단이 홀로 그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잡았다.
어쩐지 밝지 않은 표정이 염려돼 물었더니 고뿔에 걸려 컨디션이 엉망이라고 밝힌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한국기원에서 대국을 하고 왔다고 했다.
기가 허하고 진이 빠진 상태가 확실했다.
유리 박스 안에서 일본의 사카이 히데유키와 온라인 대국을 하는 유창혁 9단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다.
어제 전신 조훈현 9단처럼 유창혁 9단도 일본의 늦깎이 천재기사 사카이 히데유키에게 밀리는 것은 아닐까?
어제 3합베팅을 날렸다가 물거품이 되었는데 오늘은 되찾고야 말리라.
대국 직전에 유 왕위의 몸살을 확인했으니 사카이 쪽에 살그머니 베팅하면 춤추는 두더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유저들의 예측은-
유창혁 1.6배/사카이 2.3배
한일대결 2탄에서는 유창혁 9단의 승리를 점치는 유저들이 많았다.
2.3배면 나름대로 대박 아닌가?
그러나 베팅판을 펼치는 순간 마우스의 커서는 유창혁 9단을 지목하고 만다. 그래도 10월 달에 일본여행을 함께 하면서 히로시마 - 히코네까지 일주일 동안 한솥밥을 먹은 동지인데 베팅이라도 배신할 순 없는 법.
또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세계 최고 공격수의 관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 9단에게 올인 베팅을 시도하고 기다린다.
▲심각한 표정의 유창혁 9단,그런데 희한하게도 어제 평창동에서 들었던 자책의 신음소리가 여기서 또 들린다.
“에이! 바보 같으니.”
바둑은 백을 잡은 유9단의 실리에 사카이가 세력으로 맞서는 중이었다.
사카이 히데유키 9단은 올해 8월 일본의 7대기전 중의 하나인 기성(碁聖)위를 획득하며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인물.
상대는 4관왕으로 부동의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던 장쉬였다.
그런데 신예 사카이 히데유키가 3:2로 승리를 거둔 것.
이 도전 5번기가 화제로 떠오른 이유는 사카이 9단의 인생역정 때문이다.
그는 관서기원 출신으로 28세에 프로 입단하고 37세에 타이틀을 딴 늦깎이 기사다.
어린 시절 바둑천재로 소문나면서 각종 아마추어 대회를 석권하고 2000년에는 대학을 다니면서 세계 아마추어바둑선수권전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가 된다.
의사로 활동하면서 바둑은 그냥 즐겨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 근무하던 중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반복적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바둑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어이 프로가 됐으며 2004년 명인전 본선 리그에 합류했다.
▲장쉬를 상대로 기성타이틀을 거머쥔 사카이 히데유키(오른쪽-사진출처일본기원)
그리고 2010년 기성이 되면서 관서기원의 무관30년 한을 풀어버렸다.
“바둑에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사카이 히데유키 9단은 타이틀 획득 직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이색적인 기록을 보면 그런 호언도 흘려들을 수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는 단숨에 많은 팬들을 확보하면서 일본바둑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타이젬에서 마련한 한일온라인 대결 2탄의 결과는 사카이의 승리.
종합 전적 2:0으로 일본이 이겼다.
한국 대표들이 현역 최강이 아니고 추억의 스타들이라 하지만 그래도 과거 세계챔피언들이며 손가락으로 꼽는 천재들이어서 이기리라 믿었던 필자와 타이젬 유저들로서는 다소 허탈한 결과였다.
그러나 대국실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이제 바둑 팬들의 관전문화도 한결 세련된 느낌이랄까?
국가대항전의 결과에 죽고 못 사는 열혈애국자들보다 고수들의 바둑을 편안하게 즐기는 분들이 많은 것같다.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 타이젬이 조훈현, 유창혁, 유키, 사카이를 초청해 송년기념대국을 마련한 것이다.
우리는 영웅들의 찬란했던 전성기를 기억한다.
그 시절 그들이 보여준 투혼과 성과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영웅들과 함께 기를 쏟으며 승부처를 되돌아 볼 때 얼마나 짜릿했던가?
그 기억을 다시 한 번 되살리고 싶은 열망으로 눈 내리는 이틀 밤 타이젬 대국실을 지켜보았다.
결과가 좋았더라면 더 극적이었겠지만 일본의 후배기사들에게 승리를 내준 모양도 나쁘진 않다.
그들이 잘 두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키와 사카이가 더욱 분발해 세계대회에서도 팍팍 성적으로 올렸으면 좋겠다.
●사카이 히데유키○유창혁 흑 8집반승
그리하여 한중일 삼국지의 구도가 팽팽할수록 바둑은 재미있어질 테니까.
대국 후 유창혁 9단은 오래도록 기보를 열고 검토했다.
승부처는 역시 우상 중앙 쪽이었다.
“타이젬 회원들게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타이젬 대국실은 언제나 활력이 넘쳐 좋습니다.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2011년에도 타이젬과 우리 바둑 많이 성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들도 보다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