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상반기. 타이젬을 열광시킨 한 여자기사가 있었다. 바로 지난 1월 중국 항주에서 열린 제9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 1차전 7판의 대국을 모두 승리한 문도원이다.
당시 문도원은 입단 후 꾸준히 바둑공부에 매진했음에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해 바둑팬에게 약간은 생소한 기사였다. 그러나 예선에서 금메달리스트 이슬아를 물리치고 출전권을 차지했고, 본선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강자들을 연이어 물리치며 준비된 강자임을 성적으로 보여줬다.
타이젬 회원들은 이 준비된 여전사의 대활약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냈다. 특히 7연승을 결정지은 기사는 무려 3만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타이젬 뉴스클릭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타이젬 컨텐츠 팀에서는 상반기 스타에 문도원을 선정했고, 당시 그 때의 그 기억에 돌이켜 볼 수 있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른바 회상 인터뷰.
당시 동행취재했던 김지은 기자와 문도원이 중국에서 치러진 1차전부터 한국에서 치러진 2차전, 그리고 그 이후까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의 그 느낌들을 정리해봤다.
(아래 정리된 검정색 글씨는 당시 김지은 기자의 회상이고, 파란색 글씨는 문도원 프로의 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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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장배 예선결승에서 하호정을 꺾고 본선티켓을 거머쥔 문도원(오른쪽)
10.11.05
아직도 그 날의 그 음성을 잊을 수 없다. 본선 진출 소감을 묻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평범한 한 마디 질문에 세상의 모든 공기가 잠시 멈췄다. 5초의 침묵 뒤 간신히 나온 그 음성에 받아 적는 기자도 떨리고 있었다.
“기뻐요. 지난 정관장배에서 두 번이나 예선 결승에서 탈락해서 아쉬웠었거든요. 이번에는 시합 전에 왠지 모르게 예감이 좋았어요.”
정관장배는 연구생 시절부터 나가고 싶던 대회였다. 입단을 꿈꾸는 나에게 로망인 입단 후 정말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던 대회다. 두 번이나 바로 앞에서 대표를 놓쳤고, 입단 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터에 너무나 간절했다. 그런 나에게 드디어 첫 세계대회 출전권이 왔다. 승리가 결정됐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너무나 기뻤던 것은 사실이다.
▲항주로 가는 공항에서 박지연, 문도원, 김미리.
11.01.07
궁금했다. 누가 일장으로 나오는지. 기자의 질문에 박지연과 김미리가 양쪽에서 그녀의 볼을 당긴다. 왠지 모르게 그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됐다.
세계대회 첫 출전이라 그랬을까. 출국 수속을 밟고 있는데 긴장이 된다. 한국팀 첫 주자로 결정된 가운데 빠르면 내일 당장 대국에 임하게 된다. 아직 비행기에 오르지도 않았지만 최대한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게 노력한다.
▲개막식에서 주장 박지은을 바라보는 문도원(오른쪽).
11.01.07 오후 개막식
중국에 도착해 잠시 쉴 틈도 없이 개막식이 열렸다. 가장 많은 관심을 모았던 한국, 중국, 일본 각국 단장들의 대결순번을 가리는 대진추첨. 그 결과 첫 대국은 그녀와 일본의 아오키 기쿠요의 대결로 결정됐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니 상기된 모습이지만 그보다 안에 자신감이 보이기도 했다.
조영숙 단장님이 추첨을 하셨고, 아오키 기쿠요와 첫 대국이 결정됐다. 지난 대회 소현언니가 이겼던 상대다. 당시 그 대국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했는데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1년이 지났는데도 그 수순이 기억날 정도였다. 검토 당시 해볼만하다는 느낌이 짙었던 기억이 난다. 첫 대국으로 결정되자 나도 모르게 그 때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첫 승을 안긴 문도원이 한국팀과 복기를 나누고 있다.
11.01.08 7차전 제1국
그녀의 첫 대국. 세계대회 첫 출전이라는데 긴장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나를 비롯한 많은 기자들의 카메라가 그녀를 향해도 그녀는 오직 바둑판만 바라볼 뿐이다. 세계대회 첫 본선 출전이라는 사실에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한국에 첫 승을 안긴다.
220수만에 거둔 불계승. 기쁘다는 느낌보다 ‘첫 판이 끝났구나. 이겼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복기까지 끝나고 마지막 한 개의 돌을 다 담을 때까지 그 자리에 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합 때 잘 굳는 편이 아닌데…
▲문도원(오른쪽)과 지넨 가오리의 대결.
11.01.10 1차전 제3국
3연승에 도전하는 그녀. 상대는 일본의 지넨 가오리다. 이미 3승을 거둔 상태고, 바둑도 나쁘지 않아 박지은, 박지연, 김미리 등 검토실의 한국여자팀의 표정은 밝다. 그런데…
“간단한 수인데, 도원이가 못 볼 리가 없는데….”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한 수 앞을 가릴 수 없는 복잡한 수상전과 초읽기에 몰려있는 양 대국자. 과연 누가 이길까.
전날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어 당시 컨디션이 말이 아니였다. 원래 티를 내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지연이, 미리에게도 “머리가 살짝 아프지만 승부에는 문제없어!”라고 말은 했지만 머리가 상당히 어지러웠다.
정신없던 대국이 끝났고, 운이 좋게도 승리했다. 복기할 때 지연이가 간단히 이길 수 있었다며 여러 참고도를 보여줬다. 저런 수가 있었나? 어렵지 않은, 아니 너무나 쉬운 수순들인데 대국 당시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차전 7번째 대국. 스즈키 아유미마저 물리친 문도원(오른쪽).
11.01.14 1차전 제7국
6번째 대국에서 국제전에 강한 송롱후이에게 그녀는 승리를 거뒀다.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저 갸날픈 체구에서 어찌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하루의 휴식도 없는 연이은 대국에 피곤 할만도 할텐데, 자신은 체력하나는 타고났다며 오히려 기자에게 피곤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 젊음이, 그 당당함이 눈이 부시다.
바둑만 생각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일까봐 항주에 있는 동안 외적인 부분에 눈곱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기사가 궁금했다. 인터넷도 하고 싶었고, 미리가 노트북도 가져와서 그런 여건도 충분했다. 그런데 보지 않았다. 저절로 그렇게 된건지. 최종국에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1차전 마지막 대국도 승리했다. 그렇게 나의 첫 세계대회 원정 대국의 마지막 밤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11.01.15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다.
입국 날이 밝았다. 그녀의 아침은 분주하다. 오후 인천행 비행기 시간까지 3시간의 짧은 자투리 시간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산다. 연이은 시합에 단 하루의 관광도 못 하고 호텔에 갇혀있던 그녀의 식사시간 외 첫 나들이다.
선물을 정성껏 고른 그녀는 소중히 짐을 챙긴 뒤 항주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그녀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마도 마중 나온 그녀의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나보다.
부모님과 소중한 사람들의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고, 비행기에 오르는데 기분이 좋았다. 이제 부모님을 뵙게 된다. 게이트 문이 열리자 틈 사이로 부모님의 얼굴이 보인다. 항상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부모님. 거의 열흘 만에 뵙는데 1차전의 긴장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다.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시는 부모님을 뵈니 기분이 좋다.
집으로 도착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 과묵하신 아버지도 나의 첫 해외 본선대국이 궁금하셨는지 “긴 일정을 어떻게 견뎠니. 수고했고 너무 잘했다”“ 중국음식이 입에 맞았니? 환경은 어땠니?”라며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계속 물어보신다.
너무 좋았다. 부모님과의 즐거운 3시간의 대화가 끝나자 일순간에 긴장이 풀어졌는지 너무 피곤했다. 순간 모든 것이 다 녹아내리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긴 잠에 빠졌다.
다음날, 밀린(?) 타이젬 기사를 봤다. 평소에 자주 보는 타이젬 기사인데 내가 자주 나와서인지 느낌이 다르다. 내 이름으로 다양한 삼행시를 지어 준 유저들의 반응과 애정 어린 댓글에 기쁘고 감사했다.

11.03.22~28 2차전
1차전을 멋지게 치러낸 그녀이기에 2차전이 더욱 기대됐다. 과연 그녀는 서봉수의 진로배 9연승 기록을 깰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고 그녀를 지켜봤는데 결국 탕이에게 패하고 말았다. 아쉽게 연승이 멈췄지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낸다. 탕이가 요시다 미카에게 패했다. 그리고 한국은 출전한 김미리가 소중한 1승을 거뒀지만 루이에게 패했고, 결국 루이와 박지은이 최종국에서 대결하게 됐다. 아. 그 드라마에 숨이 막힌다.
미리가 승리해 한중전만 남았다. 미리가 패하고, 이어 지연이와 하진언니까지 패했다. '최종국이 오는구나 한국팀이 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은언니와 루이 사범님의 바둑을 지켜봤다.
종국. 지은언니가 이겼다. 같은 여자기사지만 최종국이고 큰 판인데 대국 후 너무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지은언니를 보며 우리팀이 우승했다는 느낌보다 ‘대단하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1.06~
정관장배 시상식까지 마치자 조금은 아쉽다. 여자상비군을 하는 그녀는 한국기원에 갈 때마다 그 어떤 기사보다 자주 볼 수 있었다. 정관장배 이후 그녀는 지지옥션배 본선 진출을 제외하고 잠잠하다. 하지만 지난 정관장배에서 기다렸다는 듯 폭발한 그녀의 또 다른 준비된 폭발을 기자는 기다린다. 언제든지 준비된 영웅만이 기회를 잡기 때문에.
정관장배 이후 무여회와 여자상비군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주 2회 장수영 바둑도장도 찾으며 매일같이 바둑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도장 출신 프로, 연구생들과 중국을 찾았다. 우리는 중국기원에 가서 중국기원 프로들과 교류전을 가졌다. 나는 왕천싱, 왕샹윈, 리허, 송롱후이, 천이밍 등 여자기사들과 겨뤄 3승 4패를 거뒀다. 매일 하루 두 판씩 대국을 가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바둑을 찾는 느낌이 좋았다.
일정 기간 머무른 중국기원은 내 예상보다 컸다. 기원 내에서 숙식하며 대국과 연구를 하는 여자기사들을 보며 알고만 있던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니 ‘더 열심히 해야되겠다’라는 생각과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정관장배가 끝나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어느덧 익숙해진 생활에 그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충격을 안고 있던 차에 다시 나에게 불을 붙여준 계기가 됐다.
정관장배의 영광을 잊지 않지만 이후 내가 열심히 안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여류국수전, 여류명인전, 여류기성전. 여류기전에 욕심이 난다. 루이사범님을 넘어 타이틀에 도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