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leh배
쉼표와 마침표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을 보고 나서
2011-12-25 오후 1:08:07 입력 / 2011-12-28 오전 10:22:37 수정

▲올해 무관이 된 이창호 9단.
S#1. 불분명한 제국의 경계
이상한 일이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창호의 시대가 언제 접혔었지?
무슨 말씀을!
꽤 오래 전부터 이세돌의 시대였는데.
그래, 그랬었지.
그걸 모르진 않는데 언제 제국의 연대표가 바뀌었는지 모호하단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그렇다.
두 영웅의 전면전이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바둑 사에 명멸한 일인자의 연대표를 들여다보라.
조남철은 김인에게, 김인은 조훈현에게,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왕관을 물려주었다.
부드럽게 말해 물려준 거지 터놓고 얘기하자면 전면전을 통해 도전자에게 무참히 패배하고 정상에서 하산한 것이다.
그런데 이창호와 이세돌의 경계는 분명하지가 않다.
두 사람이 모든 타이틀 전선에서 전력을 총동원해 대전을 치른 기억이 없다.
이창호는 언제부턴가 무소불위의 힘을 잃었고 이세돌은 해질녘 땅거미처럼 스멀스멀 영토를 확장했다.
황제 대관식이 따로 없었다.

▲2001년 LG배. 이창호의 역전 우승.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2001년 엘지배에서 떠오르는 별 이세돌이 절대권력 이창호에게 도전장을 내고 폭풍처럼 반상을 휩쓸며 선제 2연승을 거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창호는 중원의 철벽이었다.
그 누구도 이창호를 상대로 그처럼 화려하고 현란한 전략과 전술을 펼친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세돌은 3연패를 당하며 공성에 실패했다.
역시 이창호였다.
하지만 그 바둑으로 이세돌은 단번에 이창호의 후계자로 떠올랐다.
이세돌의 바둑은 격정(激情)의 소나타와도 같았다.
격정은 안정적이지 않으나 보는 이의 심장박동을 끌어올린다.
그래서 바둑 팬들은 새로운 도전자의 출현에 환호했다.
이창호의 태평성대는 편안하고 믿음이 갔지만 너무 오랜 감이 없지 않았다.
이세돌은 그렇게 북방의 용맹한 유목민족 기마부대처럼 질풍을 일으키며 사막을 가로질러 철옹성벽을 두들기고 물러났다.
그리고 같은 해와 이듬 해 그들은 두 번 더 부딪혔다.

▲2002년 왕위전. 다시 이창호의 승리.
바둑왕전에서는 2:0, 왕위전에서는 3:2 -
역시 이창호의 승리였다.
그렇지만 왕위전의 스코어가 예사롭지 않았다.
엘지배처럼 이세돌이 또 두 판을 건져간 것이다.
그래도 이창호의 아성은 굳건했지만 당사자 두 사람은 다가올 상황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으리라.
이세돌의 탐측경은 돌부처의 미세한 균열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고 중원의 지배자 이창호는 미묘하고 불길한 예감을 애써 감추었을 터.

▲2003년 LG배 이세돌 우승, 후계자 암시.
아니나 다를까 2003년 엘지배에서 이세돌은 이창호와 정상에서 만나 3:1로 타이틀을 쟁취한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2004년 왕위전에서 이창호가 승리하고 이후 5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상대결은 없었다.
그 시기 최철한과 박영훈 등이 영주(領主)와 제후 세력으로 이창호 제국을 위협했다.
2009년에야 이창호, 이세돌의 정상대결이 바둑왕전에서 성사됐으나 이창호가 타이틀을 가져갔다.
이때는 이미 이세돌의 전성기였으므로 국지전에 불과할 뿐.
그리고 2010년 물가정보배에서 이세돌의 2:0 승리.
이것이 두 영웅의 기록이다.

▲아이티 난민 돕기 대국 후 악수하는 이창호와 이세돌. 바둑판을 앞에두고서는 언제나 치열했지만, 뜻 깊은 일에는 손을 마주 잡았다.
결승전에서 만나지 못한 5년의 공백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는가?
엘지배 이후 10년의 세월 동안 두 영웅은 제대로 된 전면전을 치르지 못 했는데 그 사이 중원의 패권은 자연스레 이세돌에게 넘어가버린 거였다.
불멸의 이창호 제국은 이세돌이라는 강적에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에서 치고 들어오는 다수의 세력과 세월의 풍화에 의해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세돌은 뭔가 허전하지 않았을까?
'존경하는 선배 이창호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영광이다.'
이세돌의 겸손한 소감은 진실에 가까우나 그 안에 왕조의 운명을 가르는 대전(大戰)에 대한 열망이 녹아있다고 읽는다.

▲2011년 12월. 국내 최다우승금액을 자랑하는 Olleh배 결승전이 피어올랐다.
S#2. 눈물 같은 반집
2011년을 마감하는 12월.
우승상금 1억 원의 올레배 결승전에서 마침내 영웅들이 조우했다.
이세돌은 명실상부한 세계 랭킹 1위.
무관의 이창호와 저울의 추를 나란히 달기에 약간 애매하지만 우리 모두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클래식(古典)은 영원하다.
이창호는 아직 살아있다.
이대로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생각 중인 이창호.
그랬다. 역시 이창호는 큰 바다였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이세돌의 초식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비책이 있는 듯 보였다.
이창호는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묵묵히 두어갔다.
1:2로 뒤진 상황에서 전개된 제 4국.
이세돌 특유의 흔들기에 맞서 이창호는 동문서답 고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초반에 귀를 굳히는 40수, 48수는 참호전을 준비하는 비책.
▲생각에 잠긴 이세돌
그에 맞서 이세돌은 끊임없이 공중전과 백병전을 재촉한다.
왼쪽을 홀리고 오른 쪽을 때리고 빠른 속도로 전단을 찾아다니는데 희한하게 기다리는 쪽이 앞서있다는 판정이 나온다.
폭풍은 바다 밑까지 뒤흔들고 파도와 해일을 일으키지만 전체를 증발시킬 순 없다.
기다리고 견디면 구름이 걷히고 망망대해의 수평이 보이리라.
그렇게 이창호는 폭풍을 견뎌내며 클래식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모두가 이창호의 우세를 확신했고 심지어 이세돌마저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승부는 승부.
이세돌의 승부호흡은 상대가 가장 껄끄러운 곳을 계속 건드려간다.
갈등의 우선순위를 찾아가는 것.
그가 두니까 뭔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
그것이 바로 절대자의 프리미엄이다.
▲양이의 최종국 다운 반집차이. 종국 후 끝내기 수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양 대국자.
이창호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양보와 타협의 길을 찾아간다.
그러다가 공배를 두는 착오로 길을 잃어버린다.
허무한 결말.
명국의 악보를 완성하는 마침표를 찍기 직전, 쉼표 한 번이 음 이탈을 부르고 불협화음으로 파국을 맞는다.
그도 아쉽고 상대도 아쉽고 보는 모두가 아쉬운 한판이었다.
피 눈물 나는 반집.
언젠가 이창호가 그랬었지.
스승 조훈현을 연속 반집으로 돌려세우며 바둑은 천재의 영감(靈感)보다 치밀한 계산이라는 것을 주장했었지.
누군가를 울렸던 그 반집, 그 반집에 자신이 울 줄이야.

S#3. 계속되는 명화극장
세밑 이세돌의 올레배 우승은 의미가 각별하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이창호로부터 따낸 타이틀이기에 소중할 것이다.
그의 영광은 선배의 아픔과 닿아있다.
바둑 팬들은 그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소유한다.
통증과 감격.
이것이 바로 바둑승부의 드라마틱한 속성이다.
조남철은 바둑의 스크린을 열었다.
김인은 유장한 산맥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였다.
조훈현은 와이드 화면 가득히 속도감 넘치는 대하사극을 선보였다.
이창호는 밀도 짙고 디테일한 미스터리 극을 연출했다.
그리고 이세돌은 관객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서스펜스 액션물로 우리를 열광시킨다.
일인자들의 계보에는 떠나는 자의 눈물이 담겨있지만 떠오르는 자의 영광과 함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새해에는 3D 블록버스터 급 명작이 상영되길 기대한다.
아직 마침표를 찍은 게 아니고 쉼표를 찍었을 뿐이라고 외치며 이창호가 돌아오길 기대한다.
그때 이세돌이 느낌표를 던지면서 보다 완성도 높은 대본을 써주어야 한다.
이창호는 이세돌에게 확실한 대관식을 해주지 않은 책무가 있다.
TYGEM / 김종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