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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왕십리에서

-한국기원 양재호 총장 신년 인터뷰

2013-02-12 오전 10:00:52 입력 / 2013-02-12 오전 10:36:56 수정

▲한국기원 부근 커피숍 유전. 김지명 아마 6단이 운영 중이다.

S#1. 바둑동네 커피숍
관철동 시대가 있었다.
어려웠어도 그 때를 바둑의 낭만기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한국기원 건물에 관문처럼 다방이 하나 있었다.
유전(有田)다방.
그 시기의 한국기원과 떼래야 뗄 수 없는 기억의 패키지 공간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기원을 찾았다.
기원 사무국 풍경이 어지러웠다.
대규모 조직개편과 함께 새롭게 자리를 배치하느라 책상을 옮기고 의자를 빼고 부산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던 날 유난히 붐비었던 유전 카페.

"커피숍으로 옮길까요?"
기원에서 인터뷰를 하기 어려웠다.
관철동 시대를 기억하는 김지명의 커피숍 <유전>도 복잡했다.
좁은 공간인데 테이블마다 한 사람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둑계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저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양재호 총장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다시 자리를 옮겨 한국기원. 김종서 작가(왼쪽)와 양재호 사무총장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S#2. 총장의 수첩
장소를 몇 번 옮겨 기원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얼굴, 도수 높은 안경에 선량해 보이는 눈웃음.
사무총장 하마평이 나돌 때, 그의 성품이 너무 온화해 바둑계의 산적한 문제들을 강력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시선도 없지 않았다.

"수첩 좀 보여 주시죠“
언젠가 통장의 수첩을 본 적 있었다.
손바닥 크기의 수첩에 시간 단위로 만날 사람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하하. 이젠 수첩 안 씁니다."
그가 스마트폰을 들어보인다. 전자메모장을 쓴다는 뜻이다.


▲한 장의 일정표

그러면서 책상 위의 스케줄 표 한 장을 살짝 보여준다.
역시 1월 일정표에 바둑 단체 통합을 위한 발자국들이 눈에 띈다.

-한국기원 허동수 이사장께서 대바협 이사장까지 겸하시게 됐습니다. 이제 통합이 이뤄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동안 같은 뿌리의 두 단체가 힘을 합쳐도 타개가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2년 전쯤에 기원과 협회 통합이 시도됐는데 양측 대의원들의 의견 차이로 결렬됐었지요."

-2년 동안 통합을 위해 물밑에서 부지런히 뛰셨던 모양입니다?
"뛰었죠. 양측 바둑 인들의 불신과 오해가 너무 극심했습니다. 두 단체가 수평으로 달리는 동안 어린이 바둑과 여성바둑 단체도 쪼개져 반목했잖습니까? 무조건 하나 되어 힘을 합치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외적으로 중국이 부상하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저하되고 동호인 수와 지망생 수가 감소했습니다. 아울러 바둑 출판물과 인터넷 업체는 물론 시중 기원 등 바둑 관련 산업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판국 아닙니까? 어찌 됐든 더불어 가면서 격랑을 넘어야 합니다."



바둑계는 오랫동안 한국기원이 모든 업무를 총괄해왔으나 2005년 바둑협회가 만들어지고 아마 부문을 관장하면서 2009년 대한체육회 정가맹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이후 해마다 세계바둑선수권대회를 개최하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3개를 싹쓸이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재정 자립이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적으로도 어느 쪽이 한국바둑의 대표기구인지 모호했고, 프로와 아마 영역 구분이 어려운 업무에서는 마찰도 빚어졌다.
이사장이 양쪽 단체의 총수로 겸임하게 되면서 한국기원이 실질적인 공식 체육단체라는 대표성을 확보하게 되어 사무총장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이젠 할 일이 더 많아지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렇지만 이제는 바둑계에 좋은 기회가 찾아 올 거라 확신합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바둑리그조차 바람만 불면 흔들거릴 정도로 쉽지 않았습니다. 프로의 바둑리그, 아마의 내셔널 리그를 두 개의 기둥으로 세우고 보급 사업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해 바둑 르네상스를 일으켜야죠."

-총장직을 맡으면서 사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기원에 송사 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위성중계권 때문에 이해관계가 엉켰는데 만나서 대화로 해결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쪽 입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금전적 배상보다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던 거죠. 취임하는 순간 소송 취하됐습니다. 그리고 한국 리그가 10개 팀으로 순항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입니다."
단체 통합의 기운으로 한국기원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했던 양재호 사무총장.

S#3. 뜨거운 바람이기를

설 연휴 전날 총장의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진동으로 떨렸다.
삼십 분을 여유롭게 인터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현재 945승을 기록해 한국 랭킹 6위입니다. 55승만 거두면 사우전드 클럽에 들어가는데 승부사로서의 욕심은 없는지요?
"아이고, 사무총장은 대국도 할 수 없고 해설도 안 됩니다. 일천 승에 대한 염원이야 프로기사로서 없지 않지만 이제는 요원한 일이죠. 일단 바둑행정의 책임을 맡은 이상 능력이 닿는 데까지 바둑계에 산적한 일들부터 처리해야죠."

-새해를 맞아 타이젬의 바둑 팬들게 인사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까?
"타이젬은 바둑애호가들의 열린 광장입니다. 바둑계를 위해 팬들께서 보다 많은 충고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둑은 궁극적으로 팬들의 응원을 먹고 자라는 생물입니다. 제2의 중흥기를 맞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함께 동행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영하 17도. 바람 부는 날 왕십리로 나가 그를 만났다.

날은 추워도 마음은 춥지 않았다.
바람, 뜨거운 바람이 바둑 동네에 불었으면 좋겠다.
TYGEM / 김종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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