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치원 아이들은 나를 '바둑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송예슬 아마 6단이다. 친한 친구들이 대부분 프로기사지만, 이제 입단에 대한 미련은 없다. 세상 가운데 나를 던지니 이상하게 바둑은 예전보다 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어릴 땐 나이 서른이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나도 많이 바뀔 줄 알았는데 마음은 아직 10대, 20대 때 그대로다. 다만 조금은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질 뿐이다. 결혼한 친구들과 만날 때는 가끔 현실을 느끼지만, 연애조차도 아직 생각이 없다. 아! 나이가 들면서 바둑스타일은 아주 성숙해졌다. 원래 공격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이젠 차분한 수읽기 위주의 바둑이다.
바둑을 알 게 된 건 10살 무렵이었다. 아빠가 바둑을 좋아해서 주말마다 날 데리고 동네 기원에 다니셨다. 바둑학원을 다닌 지 6개월 만에 인터넷 기력 4단 정도인 아빠를 이겼다. 그 후론 나와 바둑을 안 두신다. 딸에게 백돌을 뺏기긴 싫으셨던 거다.

▲ 제 바둑 실력요? 가장 최근엔 전국체전 혼성페어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집에 우승 상패와 금메달은 많이 쌓여있지만, 올해는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들어간 첫해라 경쟁이 좀 치열했죠.
3년 전 마지막 입단대회를 마치고 기숙사도 나왔다. 안양, 안산, 산본까지 10대 때부터 따라다녔던 스승 김기헌 사범님께 인사드렸다. 27살까지 폴더폰만 가지고 마치 고시생처럼 도장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내가 드디어 세상에 나온 거다.
바둑과 작별한 건 아니지만,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카페 아르바이트. 평소처럼 압구정기원에서 리그전을 치르고, 지나가던 길에 찾은 일자리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이기도 했고, 카페에 있으면 많은 사람과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도 있었다.
청담동에 있는 카페였는데 가게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비누'라서 그 당시 만들었던 인터넷 바둑사이트 대화명이 '청담동비누'였다. 연예인들은 원 없이 봤는데 손님 중에선 다음카카오 김범준 의장이 가장 인상 깊었다. 여러 가지가 마냥 신기했다. 그런데 카페 아르바이트가 설거지와 청소까지 해야 하는 줄 몰랐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첫 직장(?)은 몸이 힘들어 한 달 만에 그만뒀다.

▲ 요즘은 대회를 나간다는 자체가 즐거워요. 이번 전국체전 결승은 불리한 형세에서 후반에 역전한 내용이 짜릿했고, 개인적으로는 아주 오랜만에 우승이라 더 감격스러웠답니다.

▲ 남자친구는 없어요. 바둑도장에 있을때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남자였고 내게 감정적으로 다가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 느낌이 오면 단호하게 선을 그었어요. 아직도 남자친구보단 바둑이 좋아요.
다음은 옷가게였다. 당당하게 '전 바둑두는 여자라서 매일은 못 나옵니다. 일정에 따라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일할게요.'라고 말하면서 구한 일자리다. 이력서에 바둑대회 수상경력만 잔뜩 쓰여 있어 황당했을 주인아주머니는 3개월 동안 날 많이 귀여워해 주셨다.
성격상 옷걸이에 옷 하나를 걸어도 침착한 표정으로 신중(어떻게 보기엔 느려터진)하게 거는 모습이 우스웠나 보다. 한번은 '넌 일은 참 못하는데 착해서 쓴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남들처럼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가게엔 별로 도움이 안 되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곳에서 옷 입는 법을 많이 배웠다.
결국 마음은 다시 바둑으로 돌아왔다. 몇 번의 실패(?)로 역시 난 '몸보단 머리 쓰는 게 적성에 맞다'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크게 없다. 재봉틀이 있는 내 방에서 유일한 취미 피아노를 즐기는 게 좋다. 아마추어 바둑 대회에 나가는 것도 즐겁고, 오후에 집 앞 공원에서 내 강아지 '열매'와 산책하는 것도 삶의 낙이다. 요즘은 유치원 바둑선생님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 유치원 아이들은 나를 '바둑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바둑은 내가 온전히 드러나는 게임이다. 아무리 숨기고 있어도 대국을 하다보면 상대의 내면과 정신세계가 보인다. 그래서인지 전문적으로 바둑을 배운 친구들은 심성도 참 착하다. 이런 친구들이 바둑만 아는 사람이라고 가끔 무시받는 걸 보면 마음 아프다.
유치원은 두 곳을 나가는데 매주 화요일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삼성그린 유치원에서 수업이 있다. 아파트로 둘러싸여 아늑한 삼성그린 유치원은 김승희 원장님이 20년 넘게 운영하는 곳이다. 원장님이 바둑에 대한 교육가치를 인정하시기에 내가 올때면 항상 밝게 웃는 얼굴로 반가워해주신다.
한국기원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후원으로 유치부 무료지원바둑교실사업을 지원한다. 구체적으로 학습용 바둑판과 바둑알, 교재 등을 지원받고 강사인 나도 마찬가지로 정부의 돈을 받아 일한다.
일곱 살 어린이들과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시간은 즐겁다.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돌을 집는 거다. 아직은 손가력 근력이 딸려 바둑돌을 검지와 중지만으로 들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바둑돌을 드는 습관을 만들면 안 되기에 곤혹스럽다.

▲ 바둑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엄지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 바둑돌을 잡는 바른 예.
또 아이들은 돌 따내는 걸 아주 좋아한다. 수업 도중에 불러서 가보면 돌을 따낸 아이는 내게 자랑하고, 상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흔하다. 집에 가서 생일선물로 바둑판을 사달라고 말한 아이도 있었다. 유치원에서 배운 걸 집에서도 하고 싶어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뿌듯하고 가르치는 보람을 느낀다.
초등학생은 아무래도 바둑규칙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앉아서 뭔가에 집중할 수 있는 나이고, 말귀를 알아듣기에 바둑도 빨리 는다. 하지만 유치원은 다르다. 일단 자리에 앉히는 것부터 어렵다. 일곱살 아이들에겐 바둑룰을 잘 알려주는 것보단 바둑돌을 가지고 같이 놀아주는 게 낫다. 아이들이 커서 흑돌과 백돌을 만져본 기억만 남아도 성공이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도 바둑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란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바둑은 승부와 협력이 공존하는 게임이다. 바둑은 상대와 함께 퍼즐을 맞추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기는 게 다가 아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이 글은 인터뷰 내용을 삼성그린유치원 송예슬 선생님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매주 화요일 나가는 삼성그린유치원 수업풍경이다.

▲ 수업은 교재를 공부한 후에 이어서 실전대국을 하는 순서로 이뤄진다.

▲ 귀여운 아이들 1.

▲ 귀여운 아이들 2.

▲ 귀여운 아이들 3.

▲ 바둑판과 바둑알, 교재는 모두 한국기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

▲ 삼성그린 유치원 김승희 원장님. 바둑학습의 가치를 아주 잘 알고 계신다.

▲ 내 수업장면이죠.

▲ 유치원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요즘 나의 일주일에서 가장 멋진 일과다.

▲사람들을 만나는 건 책장을 넘기는 것과 같다. 바둑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바둑을 알게 해준 아버지, 끝없이 후원해준 어머니, 십수 년을 함께해 이제 부모님과 다를 바 없는 김기헌 사범님, 언제나 변함없는 우정으로 고마운 친구 수진이 덕분이다. 바둑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