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8일, 박정환이 커제의 대마를 꿀꺽 삼켰다. 대국 시작 5시간만의 결과이다.
대국 초반 커제가 편안한 형세였지만 중앙에서 큰 착각을 했고, 착각은 패배로 이어졌다. 기회를 잡은 박정환은 커제의 대마를 잡고 130수만에 바둑은 박정환의 것이 됐다.
박정환은 대국 후 “바둑이 순식간에 끝이 나서 아직 얼떨떨한 느낌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됐다.
시간을 거슬러 전쟁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본다.
17일 숙소에서 ‘신진서-커제’의 대결을 인터넷으로 관전했던 박정환은 커제와의 대결에 앞서 초반 포석 연구를 했다. 박정환은 이미 숙명의 라이벌 커제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결전의 날, 박정환은 대국 시작 20분전에 일본기원에 도착했다. 대국장 옆에 마련된 휴식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보랏빛 꽃잎들을 바라보는 것일까.
한국기원 관계자가 박정환에게 혹시 출출할 때 간식거리가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해두겠다고 말하자 박정환은 바나나가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박정환의 흐트러진 옷깃 모양을 다잡아준다.
박정환이 휴식공간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이야마 유타와 야마시타 게이고는 자리에 착석해 형제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국 시작 5분전, 커제의 발걸음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날 20분 일찍 대국장에 와 편의점에 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자리에 앉아서도 바쁜 움직임은 계속됐다. 가방에서 물을 꺼내야했고, 핸드폰 전원도 꺼야했다.
반면에 박정환은 움직임이 적었다. 양복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서 바르는 정도. 보조테이블에는 부채와 작은 종이컵 하나가 단촐하게 놓여있다.
심판의 안내에 따라 돌가리를 했다. 박정환이 백, 커제가 흑을 쥐었다.
대국을 끝내고 박정환은 돌 가리기를 했는데 백이 나와서 오히려 당황했단다. 커제랑 대국에서는 서로 특별히 백번 승률이 좋아 백을 잡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흑번 포석을 연구하고 나왔다는 것.
대국이 한참 진행되고 박정환은 의자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했다. 커제는 다리를 꼬았고, 머리카락도 꼬았다. 이야마 유타는 자세에 변화가 없다. 야마시타 게이고는 의자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제 일본기원 7층 대국장에서 공간을 이동해 2층 공개해설장으로 가보자.
다카오 신지가 공개해설을 하고 있다. 공개해설은 유료인데 2,000엔이다.
관전자는 얼마나 될까.
채워진 자리보다 빈 자리가 많아 아쉬운 마음이다.
엇! 낯선 광경이다.

▲공개해설장 왼편에 있는 대형스크린에 인공지능의 형세판단이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사진은 중국 '티엔랑(Tianrang)'의 형세판단.
공개해설장 옆 대형스크린에 보여 지는 ‘인공지능 형세판단’.
대형 바둑판보다 더 큰 스크린에 인공지능의 형세판단과 참고도가 보여 지고 있다.
‘요즘 여기저기 다 인공지능으로 형세판단을 외치는데 뭐가 낯설다는 것이지?’
‘방송에서도 자주 나오는 인공지능 형세판단인데?’ 할 수도 있겠다.
이번 월드바둑챔피언십을 취재하면서 가장 유심 있게 봤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공개해설장 옆 회의실에는 각국의 대표 인공지능 개발자가 모여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고 있었다.
일본 ‘딥젠고’, 중국 ‘티엔랑(Tianrang)’, 대만 ‘CGI'가 실시간으로 이날 진행되는 대국의 형세판단을 하고 공개해설장에 제공을 하고 있었다.

▲공개해설장 옆 회의실은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었다. 왼쪽 노트북은 일본 '딥젠고' 개발자, 오른쪽은 중국 '티엔랑(Tianrang)' 개발자의 것.

▲3개의 인공지능이 하나의 대국을 동시에 형세판단하고 있다. PC1, PC2는 일본 '딥젠고'의 형세판단이며 PC3, PC4는 중국 '티엔랑', PC5는 대만 'CGI'의 형세판단 모습이다.
3개의 인공지능이 같은 대국을 가지고 실시간으로 형세판단 경쟁을 벌이고 있다니.
누가누가 젤 센가?를 넘어서 이제는 더 정확한 형세판단을 하는 인공지능이 누구인지 경쟁을 벌인다.
일본은 한 달 전, 13년만의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 일본의 자존심 이야마 유타의 우승을 염원했다. 13년만이라니 오랜 시간이다.
이야마 유타의 LG배 결승행이 결정된 직후 일본기원에서는 결승전 유치를 일본기원에서 할 것을 강력히 희망했다. 바람대로 결승전은 일본기원에서 열리게 됐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중국 신예기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세계바둑을 호령했던 일본 바둑이 서서히 침몰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느리고 또 느리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일본국가대표상비군이 인공지능 ’딥젠고‘와 대국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은 과연 바둑인공지능을 어떻게 발전 시켜나가고 있을까.
목진석 한국국가대표감독은 “이런 시도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부러운 현실이다. 대만도 CGI랑 대국하면서 훈련을 한다더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대화는 4개월 전에 기자와 나눈 대화이다. (아, ’딥젠고 프로젝트‘ 종료 건에 대해서는 곧 기사로 소개할 예정이다.)
일본은 바둑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앞서 있었다. 3개의 인공지능 개발자를 초청해 와 이런 이벤트를 진행하다니. 일본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그 곳에 조용히 시간을 투자를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15시20분.
박정환이 커제의 대마를 꿀꺽 삼켰다.
머리카락을 꼬던 커제의 손은 멈췄고,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대국 도중 양복 상의를 벗었던 박정환은 말 없이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다.
대국이 끝나고 박정환과 커제는 공개해설장에 가서 이날 대국을 총평했고, 간단한 소감을 남겼다. 다시 대국자들은 3층 검토실에 와서 공식 인터뷰에 응했다.
휴, 자리로 돌아오니 100%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어제 대국자들의 기보가 노트북 옆에 놓여있다. 많은 취재기자들이 오고가며 복사가 된 수작업 기보를 챙긴다. 마치 오래된 유물을 보듯 기보를 챙기며 생각한다.

아! 이 곳은 에도시대부터 바둑을 예도와 문화로 여기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일본이었지.
아! 이 곳은 느리지만, 탄탄한 모습으로 바둑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구다.
17시20분경, 이야마 유타와 야마시타 게이고의 대국이 끝났다. 7시간의 사투였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변함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이야타 유타와 대국 내내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야마시타 게이고의 모습이 보인다.
▶17일 취재일기, 커제의 휴대폰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