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혁
9단이 마침내 국내 최대규모 KT배에서 우승하며 무관에서 탈출했다.
유9단은 복기를 마치고 난 뒤 바둑TV스튜디오 대기실로 나와 휴대폰을 꺼냈다. 갓
백일이 지난 아이와 아내에게 우승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세계최고의 공격수'로
무시무시한 이름을 드날렸던 유창혁 9단도 어쩌면 돌배기 아들과 아내를 사랑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소탈한 가장일 뿐이라는 듯.
결승3번기 첫판에서 어이없는 착각으로 이세돌
6단에게 1패를 당할 때만 하더라도 유9단의 우승은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오늘의
유창혁 9단을 만든 건 역시 강인한 집념과 정신력. 벼랑끝에서 역전극을 일궈내며 마침내
KT배 우승이라는 대어를 낚은 유창혁 9단을 현장에서 만나봤다. 격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듯 유9단의 볼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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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기전에서 우승했다. 축하한다. 우승 소감 한마디….
▶유창혁 9단=프로기사라면 누구나 다 큰 기전에서 우승하고 싶어한다.
무관이었기 때문에 꼭 우승하고 싶었는데, 최종국을 승리해 정말 기쁘다. 특히 KT배는 TV기전인만큼
바둑팬들의 관심도 큰 걸로 알고 있다. 그동안 바둑팬들에게 실망을 안겨 드렸는데, 이번에 기대에 부응해서
다행이다.
-오늘 대국에 임하기 전 심정은?
▶유창혁=무관인 상태에서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에 이겨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이 컸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국내대회 타이틀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 상당히 집중한
셈이다.
-결승 첫판에서 패배했을 때 심정은?
우승이 힘들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유창혁=어이없는 착각으로 지는 바람에 허탈한 마음 뿐이었다. 우승을
못하겠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순간의 실수로 허무하게 진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끝내기 무렵 우승을 확신하면서
떠오른 생각은?
▶유창혁=30초 초읽기에 몰려 있는 상태여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계가도 제대로 할 여건이 안 돼 오직 끝내기에만 집중했다.
-오늘 대국 내용을 자평한다면….
▶유창혁=초반 흐름은 내가 좋았으나 중반에 어이없는 실수(백52·54를
뜻함)를 범하는 바람에 형세가 역전됐다. 중반에는 서로 실수를 주고받으며, 바둑이 굉장히 미세해졌다.
끝내기가 승부처였던 것 같았는데, 흑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다행히 승리할 수 있었다.
-대국 중 컨디션은 어땠나?
▶유창혁=일본 원정(아사이대항전)의 여독이 남아 좋지 않았다. (웃음)
하지만 나 뿐만 아니라 이세돌 6단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실수가 많았다.
'실망'했던 팬들에게 보답해 너무 기쁘다
'공격바둑'에서 안정적인 바둑으로 변신 중
-방금 말한 대로 유창혁 9단은
아시아대항전 한국대표로 일본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이 대회에서 한국팀의 성적이 부진했고, 유9단 역시
1승2패로 기대에 못 미쳤는데….
▶유창혁=긴장감이 떨어진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기사들이 이길 것'이라는 마음이 한국기사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패배를 하고 난 뒤에 안타까움이
적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승을 놓친 것은 아쉽지만, 세계바둑계를 위해서는 한편으로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 CSK배는 올해로 중단하려고 했는데, 일본이 우승하는 바람에 계속 개최하기로
변경되지 않았나.
-오늘 대국에서 비록 패하긴 했지만
최근 이세돌 6단의 기세가 놀랍다. 이세돌 6단에 대해 평가해 달라.
▶유창혁=수 읽기가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다. 그 나이 또래에는 대부분
수를 빨리 보긴 하지만, 이세돌 6단은 그 차원을 한 단계 뛰어넘은 것 같다. 나 역시 그 당시 수를
빨리 본다고 자부했지만, 이세돌 6단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더욱더 많은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KT배 결승2국 전만 하더라도
이세돌 6단에게 5연패를 당했다. 심리적인 압박감 같은 건 없었나?
▶유창혁=기록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5연패를 당했다는 것도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서 알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려고 했다.
-이창호 9단과 이세돌 6단 중
어느 쪽이 더 부담스러운가?
▶유창혁=이세돌 6단은 나와 같은 전투형이기 때문에, 서로 싸우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창호 9단은 은근히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이창호 9단과의 대국이 더 부담스럽다.
-유창혁 9단은 과거 '세계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날렸는데, 최근에는 실리지향으로 기풍을 바꾼 것 같다는 평가가 많다. 과연 그런 것인지….
▶유창혁=과거에는 수읽기에 자신이 있어 공격을 많이 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수가 빨리 보이니까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공격형 바둑을 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고나니 수가 빨리 보이는 편이 아니라서 이젠 안정적으로 국면을 운영하려 하는 것이다.
요즘엔 확신이 들 때에야 비로소 공격에 나서려 한다.
-'낙관파'로 유명한데, 이것
역시 변했나?
▶유창혁=원래를 낙관파였는데, 요즘들어서는 낙관을 하기가 좀 어려워졌다.
분명 이긴 줄 알았는데, 끝나고 보면 져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웃음)
그래서 요즘에는 좀더 신중하게 형세판단을 하곤 한다.
-몇달 전에 득남한 걸로 알고
있다. 2세에게 바둑을 가르칠 생각인가?
▶유창혁=이제 갓 백일이 지난 아들이 있다. '동훈'이라고 이름지었다.
물론 바둑은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게 해 주는 것이다. 바둑을
직업을 할 지, 취미로 할 지는 애가 자라서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정상권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
때는?
▶유창혁=자기관리이다. 타이틀을 차지하고 정상에 오른 이후부터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시간관리, 정신력, 체력유지 등 꾸준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체력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유창혁=특별하게 하는 건 없다. 잘 먹고 잘 잔다(웃음). 운동은 축구와
조깅을 즐겨하는 편이다.
-국내 최고 상금을 획득하며 무관에서
탈출했는데, 앞으로의 각오는?
▶유창혁=이세돌 6단이 지난 3월 말에 LG배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내가
보유한 공식적인 타이틀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이번에 KT배에서 우승해 국제대회 출전권이 부여된 만큼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타이젬 바둑팬들이 유창혁 9단에게
많은 응원을 보냈다. 팬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유창혁=그동안 슬럼프에 빠져 팬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 줬다. 앞으로
좋은 성적을 거둬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겠다. 변함없이 응원해주신 타이젬 바둑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TYGEM/최철용 a4g@tyge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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