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6년간 36명의 남자 프로기사들이 탄생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18명이
한 바둑도장이 배출한 기재들이다.
-89년부터 2003년까지 14년 동안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프로기사를 배출한 바둑도장.
-이 기간 육성한 프로기사가 모두 33명. 이들의 단위를 모두 합한 단수가 100단을 넘어섰다.
권갑용바둑도장.
가을에 떨어진 이름 없는 한 톨의 낱알이 겨울을 견뎌 봄날 싹을 틔우고 여름볕에 여물어 다시 가을에 맺는 결실은
놀랍고도 놀랍다. 냉정하고 냉엄하기 그지없다는 승부세계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이 철리에서 한걸음도 비껴날 수
없는 것이다.

▲권갑용 7단 부부 |
한 톨의 곡식이 주는 힘. 그러나 아무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추운 겨울과 폭염의
여름을 이겨내는 씨나락에게만 주어진다. 권갑용 7단이 그렇다. 권갑용바둑도장의 영광은 이리하여
얻어진 결실인 것이다.
권갑용바둑도장 프로기사 100단 돌파 기념회가 12월 12일 오후 6시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성대하고 화려해도 충분히 좋을만큼 그들의 결실은 값지다. 국내 프로기사 육성
전문바둑도장으로서는 최초의 100단 달성, 이것이 값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다시 들녘에 스스로
뿌리내려 맺을 앞날의 결실이 더 기대되기에 값진 것이다.
일본바둑을 대표하는 도장으로는 일찍이 기타니도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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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00단 돌파 때 여섯 살의 조치훈이 당시 '잘 나가는 신예' 린 하이펑 6단과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다섯 점 지도기를 두었다. 야무지게 팔짱을 끼고 바둑을 두던 조치훈은 그 길로 기타니도장 내제자로 입문했고
오늘날 불멸의 기사로 바둑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기타니도장은 이후 500단을 거뜬히 돌파하기까지 일본바둑을
주름잡고 이끌었다. 그러나 기타니도장이 해체된 후 이를 이을만한 '다음'이 없었다. 일본바둑이 90년대에 접어들며
급격한 하향세를 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본바둑의 하향세와 비례해 한국바둑은 득세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권갑용바둑도장과 같은 치열한 연구와
경쟁 분위기로 가득찬 바둑도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값비싼 평가를 매기는 이유다.
100단 돌파 기념식장에서 권갑용 7단을 만났다.
20년 지도자 생활의 결실…절반은 아내의 힘
-굉장히 기분이 좋으시겠어요?
"가슴 뿌듯합니다. 보람도 느끼고요. 처음에는 혼자서 단순하고 순수하게 시작한 일인데 점차
커지면서 제자들도 많이 양성했고 그 제자들이 바둑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보람
이상으로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느끼게 되지요. 제 일생을 걸고 한 일이고 앞으로도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고요…."
-현재 가르치고 있는 도장의 원생 수는 얼마나 됩니까?
"60명 선이고요, 이 가운데 한국기원 연구생이 30명입니다."
-한 20년 되었죠? 일선 지도자로 나선 게?
"그 정도 되었죠. 82년 말부터 시작했으니까…. 잠실에서 수양바둑교실로 개원했다가 87년
반포로 옮기면서 권갑용바둑도장으로 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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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갑용 7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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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기사 입단1호는 89년 입단한 박승문 5단이죠. 제자들이 잘 해주어
그 뒤로 매년 입단자를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20여년 만에 100단 돌파도 그렇지만 14년 연속 프로기사 배출도 기록감이네요.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시작 무렵이었지요. 당시 애들도 적고 재능 있다고 생각한 애들은 막상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고….
그때만 해도 바둑은 비전이 없는 분야로 인식되던 때였으니까요. 지금은 그래도 대학도 진학할 수 있고 바둑으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훨씬 넓어졌지만요."
-일선 바둑교육자로서 애환이 적지 않았을 텐데….
"제가 가르치는 교육관과 뜻이 안 맞았을 때 곤혹스러웠습니다. 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이 들릴
때도 괴로웠고요. 경제적으로 힘들 때 학부모들께서 말없이 도와주실 때는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고
힘이 났습니다. 도장도 돈이 없으면 끌어나갈 수 없는 것인지라 교육적인 측면과 상업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양면 때문에 늘 갈등했습니다."
-20년 전이면 스물여섯, 일곱 살 무렵부터 바둑지도자
길을 택했다는 얘기인데 한창 승부에 혈기방장할 나이 아닙니까? 결심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요….
"군제대 직후였지요. 공부냐? 지도자냐? 상당히 갈등한 기억이 나네요. 당시 학원이라면
피아노나 속셈, 태권도 정도나 쳐주었지 어디 바둑이 학원측에나 들었나요? (웃음) 지금은 자연스럽지만
그때는 바둑교실이라는 명칭조차도 어색하던 시절이었지요. 제 도장이 본격 궤도에 올라선 시점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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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패와 꽃다발을 스승 내외에게 드리고 있는 제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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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시훈 8단을 키우면서부터였지요."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마운 사람은 아무래도 함께 고생한 사모님,
박옥주(46) 여사이겠지요? 자기 자식 거두기도 쉽지 않은 현실에 한두 명도 아닌 제자들을 거둔다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말없이 묵묵히 도와준 아내가 가장 고맙습니다. 그만두자 말자 티격태격 수없이
부부싸움을 했지요. 그러면서 조금만 더, 더 하다가 도장이 확대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네요. 하하."
이세돌, 윤영선, 권오민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
100단 돌파 기념식순 가운데 제자들을 대표해 김강근 4단과 강승희 2단이 스승 내외를 단상에 모시고 지난날을
회고하고 몇가지 감상을 묻는 순서가 있었다.

▲권갑용 내외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김강근 4단(맨 왼쪽)과 강승희 2단. |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누구입니까? (김강근 4단)
(권갑용 7단) "여제자로는 윤영선 3단입니다. 개성이
강한건지 고집이 센건지 꽤 애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윤영선 3단은 입단 전부터 매우 힘이 강했지요.
그런데 가끔 속수를 많이 두는거에요. 이런 속수를 둬서는 바둑이 안 는다고 설명해도 자기류(?)를
고수해서…. (웃음)
남제자로는 이세돌 9단이 독특했습니다. 묘한 자기류가 있는데, 아, 이건 내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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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재능의 세계로구나! 그런 감을 받았지요. 그래서 이세돌 9단의 경우는 기세를 살리고 키워주는 쪽으로 가르쳤습니다."
(박옥주 여사) "아무래도 첫 내제자였던 권오민 3단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이세돌 9단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했는데 엄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안보이려고 화장실로 달려가던 모습이
선하네요. 세돌이를 전 삼돌이라고 불렀지요. (웃음)"
-가장 안타까웠을 때는 언제였나요? (강승희 2단)
(권갑용 7단) "나이 많은 제자가 입단을 못했을 때입니다. 새까맣게
깔고 두던 후배가 먼저 입단할 때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당사자와 부모는 상처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지요. 이럴 때 무척 가슴 아프답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박성수(42) 3단이 97년 입단했을
때는 정말이지 감동했지요. 가장 기쁜 입단이었습니다."
권갑용 7단은 도장 출신 프로기사들이 100단을 돌하한 때를 기념하여 도장 제자들과 함께 연구하고 검토했던
내용들을 담아 다섯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사활집인 '귀수마수1·2'와 끝내기 비법이 담은 '정묘수관' 등이다.
'언제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권갑용 7단의 교육철학이다.
TYGEM/정용진 sodol@tyge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