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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시평

조선시대에 바둑대회가 열렸다?

역사로 보는 바둑의 길, 프로의 길

2007-02-13 오전 11:14:15 입력 / 2007-02-13 오전 11:20:47 수정

[바둑의 길]
조선시대의 바둑사는 풍성했다. 바둑은 전 사회인의 도락이었으며 관심 사항이었다. 바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귀천의 구별도 없었다. 조선인은 바둑판 위에서 평등을 느꼈다. 정사인 실록을 조금 벗어나면 야사류인 개인 문집이 있다. 조선의 바둑을 기록한 가장 진솔한 문집은 김도수(1699-1742)가 지은 '춘추유고'일듯 하다.

춘추유고에는 바둑 고수 덕원령(德原令)을 소개하고 있다. 당대 조선의 고수로 명나라 사신이 대동하고 온 명의 고수도 이겼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50년후의 사람 유찬홍이 덕원령의 뒤를 이을 만한 고수라 적고 있다. 유찬홍은 김도수 이후의 사람들인 홍세태·이서구 등의 문집에도 나타나는 인물이다.

덕원군은 확실하지 않은 인물이다. 선조 때 종친이라는 막연한 단서를 근거로 실록에서 그를 찾아 보니 덕원군 이서가 가장 적당한 인물로 떠오른다. 이서는 세조·단종·성종시대를 바람 같이 살던 인물이다. 남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익대공신에도 오른 인물이다. 통도 컷던 모양이다.

방호련(方好連)·김효동(金孝同) 등 3천여 명이 무리로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불공을 드렸으며,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 도 또한 가서 참여하였습니다. 방호련·김효동 등을 방금 추국(推鞫)하고 있는데, 명하여 ‘가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엄하게 다스리지 아니하면 어찌 사실을 토해내겠습니까? 청컨대 가두게 하소서.
또 왕자(王子)의 출입은 마땅히 계품(啓稟)하고 가야 하는 것인데, 이제 가만히 회암사에 가는 것이 가합니까? 왕자는 연소(年少)하여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니, 반드시 노배(奴輩) 가운데 인도하는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일 창원군 성이 길에서 이효상(李孝常)·이숙기(李淑琦) 등을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아니하였다 하여 꾸짖고 욕을 주었습니다. 길에서 왕자를 만나면 피하지 아니하고 말에서 내린다는 법은 지금 《대전(大典)》에 실려 있지 아니합니다. 대신은 전하께서도 존경하는 바인데, 감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이 또한 종자(從者)들의 죄입니다.
청컨대 서(曙)와 성(晟)의 종들을 다 가두고 추국하게 하소서 방호련이 회암사에 3천명의 사람을 불러 모아 불사를 일으키고 그곳에 덕원군 등이 참석 했으니 모조리 잡아다 국문을 하자는 말에 성종은 옥이 얼마나 크기에 3천명을 가두고자 하냐며 가납하지 않는다.


▲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군호를 내릴때 한자의 중복을 철저하게 금하는 것이 법이니 덕원군은 이서가 맞을듯 하다. 실록에 보이는 덕원군의 자유 분방한 성격이 더욱 심중을 준다. 덕원군 유찬홍의 뒤를 잇는 야사의 고수는 김종귀다. 조희룡의 호산외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서구(1754-1825)의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에 김종귀와 더불어 정운창(鄭運昌)이 나온다. 정운창은 보성 사람이다. 어려서 바둑에 심취하여 십수년을 두문불출 침식을 잊고 바둑에 빠져 있다가 드디어 확연대오를 한다.

정운창은 당대 최고의 고수가 김종귀, 양익분이란 소리를 듣고 둘 중 조금 더 낮다는 김종귀를 찾아 한양길에 오른다. 정운창은 단숨에 한양까지 간다. 그러나 김종귀는 평북 순찰사를 따라 기행중(碁行中)이었다.

정운창은 한양에서 정박(1715-기장 현감역임)등과 바둑을 두어 여비를 마련 하고 북행을 자청 한다. 그러나 해주 평양을 거쳐 안주까지 가도 김종귀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운창은 한 주막에서 자탄을 한다.

ㅡ士之抱才器而相遇猶如是乎?吾不忍返矣.

재능을 지닌 선비가 그것을 알아줄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 내 차마 걸음을 돌릴 수 없구나.

정운창은 바둑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둑외에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호적수가 있다기에 천리 먼 길을 걸어 관서땅에 와서 그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오직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뜻이 있기에 길도 있다. 정운창은 끝내 관서의 어느 옹벽진 고을에서 김종귀를 만난다. 이서구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ㅡ於是左右設奕具進子樞兩階布陣均道一再轉.

드디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바둑돌을 서로 포진하고 보니 팽팽했다. 일전이 그렇게 시작 되었다.

정운창은 눈물이 났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이던가. 조선 제일의 고수를 만나 그를 꺾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믿는다. 바둑은 시작 되었고 정운창의 운행이 물 흐르듯 유연 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김종귀의 운행이 부자연스럽다.

이 서구의 기록은 우리의 고대 바둑의 형식을 보여 주는 최초의 기록이자 최고의 기록이다. 진자(進子)하고 양쪽이 포진(布陳)을 했다고 한다. 흑백돌을 8개씩 놓고 시작 하는 우리의 바둑의 형식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모름지기 프로의 길이란 말이 있다. 자신을 팔아 돈을 잘 버는 것이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는 도전을 하는 사람이다. 정운창은 가난한 보성의 천민 출신으로 바둑이 좋아 오직 바둑의 길을 걸어 마침내 조선 제일의 고수와 마주 앉는다.

정운창은 바둑으로 명인의 길을 보여준 사람이다. 명인의 길은 곧 프로의 길이다. 이 대국은 정운창이 이겼다. 그리고 정운창은 다시 김종귀를 통하여 바둑의 더 깊고 오묘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에 온몸을 던져 버린다.



[프로의 길]

얼마전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를 읽다가 나는 영조때에 있었던 유소년 바둑 기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많은 바둑의 기록은 있었으나 어린이 바둑 대회라니 그것도 눈 앞에 그려지는 듯 생동하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나는 이 기록을 한역을 하고 바둑계의 중진 기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미 한역 작업을 걸쳐 세상에 나와 있는 것이고 권경언 씨가 쓴 한국 바둑사에도 소개가 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과문한 나를 자책하며 나는 한국 바둑사와 이 원전이 처음 소개된 책을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1966년에 서울대 고전간행팀에서 한역을 하고 다섯권의 책으로 이미 출판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원문과 한역 부분을 보고 다시 뒤통수를 얻어 맞았다. 한역의 잘못으로 한국 바둑의 중요 기록 하나가 망실된 현장이 보였다. 이건 기쁨보다 실망이 컷다. 서울대 필자들의 한문 실력이 부족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66년의 시절을 미루어 한역자들의 눈에(그때 분명 이상했을 것이라 믿는다) 유소년 바둑이 영조 시대에…? 하는 생각에 아래와 같은 한역이 된것으로 본다.

이런 기록이 후에 바둑인들이나 여타 식자들의 검토속에서 한번도 검증이 되지 않고 40년을 흘러 왔다는 것이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한국 바둑사를 감히 입에 담으며 이런 기록을 놓치고 오역을 답습하는 현실도 씁쓸했다.

余素不能奕棋 非徒不能 亦不慾爲也.
十五六之歲 往少年會. 大張此技 芳觀四圍 每下一子
必大誼共曰(영처잡고)

나는 본래 바둑을 잘 두지 못한다. 또 잘 두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십오륙 소년때 큰 바둑 두는 곳에 갔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사방을 에워 싸고 바둑돌 하나를 놓을때마다 죽었느니 살았느니… (서울대 간행본 한역)

나는 원래 바둑을 잘 두지 못한다. 아주 못 두는 것도 아니지만 잘 두려고 해 보지도 않았다. 나는 십오륙세때 소년들의 기예를 겨루는 큰 바둑 대회에 간적이 있었는데 바둑판을 사방에서 에워 싸고… (나의 한역)

한문은 서구식 문법론이 들어 오기 까지는 실사(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와 허사(부사 전치사 감탄사 어조사)만으로 분류 된다. 이 문자는 일단 也. 로 한 문장이 끝난다. 也는 종결사이다. 정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확인 하는 판단구다.

다음 문장에서 주어인 吾가 생략 되어 있다. 한문의 문장을 구성 하기 위해서는 술부 혹은 술목 구조를 불문 하고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문은 간혹 주어가 생략되어도 무방한 때가 있다. 이것이 한문의 특징이다. 주어의 생략은 앞에 이미 언급 한 경우, 일반적인 서술, 대화와 문답이다. 이 경우는 앞에 余가 쓰였던 이유다.

十五六之歲 往少年會. 大張此技 芳觀四圍.

이 문장은 주어절 서술절 목적절 보어절 관형절 부사절이 내포 되어 있는 포유복합문이다. 之는 허사이면서 접속사다. 而와 같은 뜻이기도 하다. 십오륙과 살(나이)를 이어준다. 그리고 시간 부사 往이 나온다. 과거의 이미 오랜 시간 일련의 동작중 가장 빠른 동작을 나타낸 말이다.

모임 會는 소년들의 모임을 말한다. 이덕무의 십오륙세 소년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 구조상 그렇다. 그리고 조선 시대 십오륙세는 소년이 아니다. 경국대전은 16세면 병역의 의무가 있었고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이덕무는 실제로 16세에 백씨와 결혼을 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이미 16세에 장가를 갔던 사람이 그 시절을 회억하며 소년시절이라 했겠는가.

大張은 큰 치알을 말한다. 대열(군사 훈련) 강무(사냥)등에 대장을 친 기록이 있다. 此技는 재주를 다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덕무는 십오륙세에 소년들의 기예를 다투던 큰 바둑 모임에 갔었던 것이다. 이덕무는 정조의 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바로 그 사람이다.

결국 이 기록은 이덕무가 보았던 영조시대에 조선에는 유소년 바둑 대회가 거창하게 열렸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기록을 해독하지 못한 분별 없는 후대 사람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기록이 주는 의미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국바둑사도 좋고 다시 쓰는 바둑사도 좋지만 한국 바둑사는 기본부터 다시 챙겨야 한다고 본다. 나의 생각은 그렇다.

TYGEM / 이청 바둑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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