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갑작스런 패배 그리고···] 역전에 대한 희망이 현실로 바뀔 수 있다는 설레임에 사로잡혀 있던 순간, 갑자기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형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비관해서 마지막 옥쇄를 각오한 것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는 대착각이 등장한 것이다.
| 형은 물러서야 할 장면에서 붙여서 끊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고, 그것은 조한승 8단이 보자마자 곧바로 성립되지 않는 무리수라고 단정지을 정도로 어렵지 않은 수였다. 마치 어제 콩지에 7단이 갑자기 중급자도 볼 수 있는 촉촉수를 못보고 무너진 것처럼 오늘 역시 역전의 흐름에서 예측불허의 패착이 등장하며 갑작스럽게 승부의 저울추가 기울어진 것이다.
검토실은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몇 집 손해본 것이 아니라 엄청난 착각으로 큰 수가 났기에 이제 더이상 만회를 할만한 시간도 장소도 없는 상황이었다. 필연적인 수순으로 돌을 던졌다는 현장 소식이 전해졌다. 몇 명의 사진기자들만 본능적으로 장비를 챙기고 현장으로 출동했을 뿐, 대부분 사람들 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홈팀인 중국도 아니고 객관적 전력의 우위인 한국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일본의 우승에 입을 맞추고, 또한 그 과정에서 연이틀 어이없는 상황들을 연출해낸 '승리의 여신'의 짖궂음이 얄미울 뿐이었다.
내게 마음을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급작스럽게 승부가 결정됐다. 몇 분에 걸쳐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대국실 현장을 뒤따를 수 있었다. 치열했던 추격 과정을 반증하듯 바둑판 주위의 공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곳곳에서 터지는 카메라 섬광은 눈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형은 만면에 홍조를 띈 채로 연신 흐르는 땀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고, 반면 요다 9단은 승리가 믿겨지지 않은 듯 천장과 바둑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글 같은 승부세계에서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명확히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손가락 짚기 형식으로 복기가 시작됐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진행요원이 생중계 시간관계상 시상식과 인터뷰가 곧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치열했던 승부를 되돌아보는 복기는 바둑이 수천년에 걸쳐 예를 중시하는 게임으로 사랑받게 되는 가장 큰 이유였지만, 스포츠로 바뀌어가는 현재의 추세에서는 무엇보다 팬들의 볼거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형은 돌들을 쓸어담으며 먼저 화장실에 들른 후 참석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취재진들의 '인의장막'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형이 밖으로 걸어나오는 도중, 어느순간 중심을 잃었는지 옆으로 쓰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발을 헛딛은 것이라면 곧바로 반대쪽 발로 땅을 짚고 중심을 잡았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옆으로 쓰러져가고 있었다. 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얼른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짚어넣어 힘을 주었고, 형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내 팔에 몸을 기대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현기증이 난 것 뿐이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불안한 마음에 옆에 바짝 붙어서 화장실까지 동행한 나는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마주한 채로 형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칸막이 안으로 들어간 형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어느정도 침묵만이 흐르다가 곧 안쪽에서 '우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내용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심장을 찢을듯한 소리는 한두번이 아닌 여러차례 반복해서 이어졌다. 이제껏 십년 넘은 시간동안 외롭게 그리고 힘겹게 짊어왔던 어깨를 부숴버릴듯한 부담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소리로 들렸다.
순간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울속의 내 자신을 바라보며 되묻고 있었다. 20년 동안 승부 외길을 걸어왔고,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경험했던 형이 왜 유독 오늘 대국에서는 미련을 못 버리고 사력을 다했는지. 국가대항전 최종국이라는 타이틀만 떨쳐버리면 단지 한 판의 바둑일 뿐인데, 초반 수읽기 착오로 40집이나 되는 대마를 헌납했다면 진작 포기했을 법도한데 한 판의 패배가 뭐 그리 대수라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오바이트를 할 정도로 모든 땀과 근육, 정신과 체력을 쏟아부었던 건지...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따스한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검토실에서 형의 처절한 추격을 지켜봤던 창하오 9단이 내 앞에서 치켜올린 엄지손가락의 의미가 절실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출전하며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밝힌 후배 조한승의 배려의 마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혼자가 아닌 5명 선수의 부와 명예, 더불어 천만 바둑팬의 기대와 희망이 걸려있는 절대 놓쳐서는 안될 대국이었기에 형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었고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며 말 그대로 몸에 남아있는 '모두'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어쩌면 수없이 많이 획득했던 승리 안에도 이런 과정들이 숨어있었을 것이다. 단지 승리했기에 모든 아픔이 기쁨으로 씻겨지고 고통이 환희로 탈바꿈되었을 뿐. 그랬기에 살이 에이고 뼈가 깎이는 쓰라린 과정을 잠시 기억 한 편에 묻어두고 있었을 뿐이리라. 농심배 6연속 우승, 국가대항전 10연속 우승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의 어두운 그림자 안에는 이렇듯 한결같이 자신의 전부를 걸어왔던 한국, 중국, 일본 승부사들의 뼈와 살, 땀과 피눈물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작은 이변의 연출] 5분 정도 흘렀을까. 외롭게 패배의 후유증을 곱씹었던 형은 충혈된 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찬물로 세차게 얼굴을 헹군 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말없이 옷 매무새를 가다듬을 뿐이었다. 곧바로 공개해설장으로 향했는데 약간 지체해서인지 이미 시상식 행사가 벌어진 이후였다. 늦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진행요원의 설명을 듣고 발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그 순간 형의 모습을 봤던 기자들이 하나 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중 한 기자가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일반적으로 패자에게 인터뷰를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패장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고, 승부에서 패배한 자의 말은 어떤 미사여구가 들어가도 변명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패자가 인터뷰를 거절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게 관례다. 이런 이유로 형이 정중히 인터뷰를 거절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뜨거운 바둑열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생각했던 것인지 아무튼 형은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몸을 이끈채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사를 표시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기자들에게 "시합으로 피곤한 상태니 최대한 간단하게 끝내달라"고 부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대국에 승부처는 어디라고 생각하는지? ->중반에 어려운 싸움이 있었는데 큰 손해를 봤다. 대마가 그렇게 죽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팀이 올해 처음으로 우승을 놓쳤는데, 보통의 대국보다 상심이 크지 않은지? ->오늘 대국을 돌이켜볼 때, 내가 못뒀다기 보다 요다 9단이 잘 둔 바둑이다. 상대가 잘 둬서 졌으므로 패배에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을 것 같다.
앞으로 한중일 삼국의 판도가 어떻게 변화하리라 예상하는지? ->삼국 서로간의 실력차는 결코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신예기사들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른데, 특히 중국기사들이 신예 쪽에 강세를 보이는 것 같다. 일본기사들은 상대적으로 노장기사들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나라가 주도권을 잡을지는 아직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길지 않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참 시상식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기에 사진 촬영을 하든 기자회견을 하든 아무튼 취재진들은 그 쪽에 있어야 맞을 것 같은데, 아이러닉하게 대부분의 기자들은 문 밖에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형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양심적인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키팅 선생의 마지막 퇴장을 위해 상식적인 수업태도를 거부하고 하나 둘 책상 위에 올라서며 '캡틴, 나의 캡틴!'이라고 외쳐준 학생들의 그것처럼, 취재진들은 신화가 종결된 오늘까지 10여년간 변함없이 최선, 배려, 겸손의 모습으로 정상을 지켜온 형을 위해 잠시 상식적인 취재방식을 접고, 작은 이변을 연출해 주는 듯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어진 공식 스케쥴인 농심초청만찬까지 끝난 이후이다. 이름도 비슷한 닮은꼴의 두 사람이 있었다.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전 국가대항전 패배로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을 형은 어느덧 "한승이한테 미안해서 술이라도 한잔 사야겠다"며 조한승 8단의 방으로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고, 10여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 속이 곪을 대로 곪았을 중국팀의 정신적 지주인 창하오 9단은 '첫 패배를 안은 친구에게 위로주라도 한잔 사줘야겠다'며 동생 영호의 핸드폰으로 버튼를 누르고 있었다. 상하이의 마지막 밤은 비록 아픔은 있었지만 이렇듯 두 사람의 배려하는 닮은꼴 우정 으로 아름다울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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