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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스토리

다시보는 농심배7/ 역전의 흐름

동생 영호가 직접쓰는 이창호 스토리7

2007-03-15 오전 10:11:42 입력 / 2007-03-15 오전 10:12:14 수정

[절망의 순간 앞에]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수는 유난히 큰 승부에서 자주 일어난다. 주위에 배치된 많은 부가물 들에 의해 인간의 심리는 요동치고, 결국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해 실수가 등장한다는 뜻이리라.

몇 수의 진행을 지켜본 나로서는 형의 선택이 실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검토실 레이더에 잡힌 '3패빅'의 수순은 최상의 시나리오였지만, 형의 수읽기는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돌다리를 두들기지 않고 건너봤지만 아쉽게도 거기에는 커다란 금이 나 있었던 것이다.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오히려 평소답지 않게 도박성 선택을 하고 이를 과감하게 결행한 요다 9단의 기세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이제 막 중반에 들어서는 순간인데, 돌이킬 수 없는 형세가 됐다. 대마가 몰살한 것이다. 한 수 느 린 수상전으로 알고 최후의 방편으로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석작전을 노려봤지만,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요다 9단의 기발한 묘수까지 등장하며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와 더불어 행운의 여신의 손짓, 요다 9단은 오늘 최고의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평소의 형이라면 미련없이 돌을 던졌을 것이다. 약 40집에 이르는 대마가 별다른 대가 없이 죽은 상황에서 더이상 승부의 끈을 놓지 않으면 누구보다 본인의 아픔이 가장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판이 가진 의미가 너무 크다고 판단했는지, 연승식 단체전 불패의 신화가 자신의 손으로 깨어지는게 못내 아쉬웠는지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깊게 패인 상처를 움켜쥐고 출혈을 최대한으로 막은 채, 마지막까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흘러보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놓지 않았다.

교묘하게도 절묘한 순간에 맞춰 모니터에 두 대국자의 얼굴이 교대로 클로즈업됐다. 요다 9단은 굳이 비유하자면 야구 경기에서 3점 차로 뒤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때렸다고나 할까.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를 상대로 통쾌하게 대마를 잡은 것이 믿기지 않은 듯 굳어있지만 약간만 자극해도 곧바로 함박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고, 반면 형은 초반의 실수를 정확하게 응징한 요다 9단의 완벽한 승리를 인정하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험으로 비춰볼 때 형세가 많이 불리하거나 막 패배를 시인하고자 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검토실에서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비록 마음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각인시키며 위로를 받으려 했다. 준속기전이기에 그리고 격렬한 기풍으로 초반부터 대마싸움을 걸어갔기에, 대마가 잡히며 형세를 그르친 상황은 언제듯 발생할 수 있는 예측가능한 미래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담담 하게 수없이 많은 바둑 중 단지 한 판의 바둑에서 패배한 것일 뿐이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으며 14연승의 신화, 10년에 걸친 한국의 연승식 불패의 기록, 그 거대한 둘레를 벗어나려 했다. 어느덧 모든 승부의 기운이 패배로 귀결되어가는 흐름에 나역시 보이지 않게 동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전의 흐름]
피를 말리는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잠시 밖으로 나왔다. 고층 건물들 사이로 불어오는 쌀쌀하고 습한 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상념에 잠겼다. 기억을 더듬어 형과 함께한 중국여정을 돌이켜보니 97년에 시작한 제1회 한중천원전 때부터였으니 어느덧 10년 가까운 세월을 승부사의 매니저로 함께 했다. 크고작은 악조건들을 극복하고 마음속 깊이 박힌 응어리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잉씨배 우승, 그리고 꼭 이겨야 할 시합에서 패배의 쓴잔을 맛봐야 했던 뼈아픈 기억들이 머리 속에서 교차되며 떠올 랐다. 초반 좋지 않은 흐름으로 왠지 오늘 하루가 후자의 기억으로 남으리라는 예감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약 20분 정도 머리를 식히고 검토실에 들어섰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침울한 분위 기와는 달리 조한승 8단이 주축인 한국 검토진에서 조금씩 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암시적으로 한국의 우승을 기원했던 중국 검토진도 점차 시끄러워진 것이다. 자연스레 바둑판으로 눈이 돌아갔다. 현재 형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하나 밖에 없었다. 먼저 한쪽 울타리를 뚫리지 않게 정비한 후, 최대한으로 간격을 벌려 승부수를 날리는 것이다. 상대가 양보하면 집을 최대한 지어 후일을 도모하고, 반발해서 침입이라도 하면 대마 사냥에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이다. 형의 승부수에 요다 9단은 예상대로 한발 물러섰다. 넉넉한 형세를 감지하고 바짝 조인 목줄을 느슨하게 풀어준 것이다. 요다 9단 의 물러섬으로 형은 희박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창하오 9단은 중국 검토진에서 콩지에 7단과 함께 검토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미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대국인 것처럼 열성적으로 의견을 내고, 참고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연찮게 검토실 복도에서 반대 방향으로 이동 중인 창하오와 마주쳤다. 눈으로 가볍게 아는체하고 지나치는 게 보통의 경우인데, 이번은 달랐다.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형의 투지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함포된 의사표시인 듯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국검토진에 합류해 검토를 엿들었다. 백으로서는 하변을 한수 더 지키는 게 확실하지만, 지금 형세가 여유롭지 않고 한 눈에 보이는 약점도 없으니 손을 빼고 좌변 흑집을 삭감해야 한다는 예상평이었다. 덧붙여 그렇게 진행될 경우 미세한 계가바둑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애매 한 평가에 답답함을 느낀 한 중국기자가 돌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침착하고 끝내기가 강한 콩지에 7단에게 도대체 어디가 좋은 것 같냐는 적나라한 질문이었다. 콩지에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만약 내가 흑백을 선택할 수 있다면 백을 잡고 싶습니다"며 백돌을 하나 집어올렸다. 실제 내 귀로 들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절망의 검붉은 구름이 걷히고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가 내비쳤다. 형은 검토실의 예상도를 저버리고 특유의 느릿한 승부호흡을 보여주며 하변에까지 가일수를 하자 여기저기서 '과연 이창호'라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요다 9단은 필연적인 수순으로 좌변을 집으로 확보하기 위해 지켜보지만 형은 느긋하게 위에서 누르며 삭감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수나 투자된 좌변 집을 귀의 맛들을 이용해 깨뜨리며 돌의 효율 면에서 상당한 이득을 취했다. 골치아픈 장면에서 앞서는 자는 한 발 물러서고, 뒤쫓는 자는 최대한 물고 늘어지며 득을 보는 흐름, 흔히 승부세계에서 말하는 역전의 시나리오가 분명했다. 인터넷 생중계를 맡은 '진로배 9연승의 신화' 서봉수 9단 역시 '미세하다'는 말로 끝내기에서 조금이라도 강점을 보이는 형에게 무게중심을 실어주는 듯 했다.

TYGEM / 이영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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