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6년 2월 22일 / 최선의 준비, 포석
휴식일이라 늦잠을 자리라는 예상을 깨고 형은 비교적 이른 시각인 9시에 기상했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아침식사를 하고 싶다며 씻고 준비를 했다.
| 혹시나 싶어 조한승 8단 방으로 전화를 걸어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을 잡고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시간이 일러 밖으로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호텔 내의 뷔페식당을 찾았다.
여러 5성급 호텔을 돌아다녔지만 한마디로 이곳보다 비싼 곳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보통 아침식사는 점심가격의 반 수준으로 80-90위안(약 한화 만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여기는 170위안(서비스료 15%별도, 한화 약 2만원)으로 거의 두배에 가까웠다. 어차피 내 돈 주고 먹는 것은 아니지만(호텔 내 아침식사는 주최측에서 제공) 알뜰함으로 무장한 내게는 거부감이 느껴지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누가 내더라도 가격은 지불되는 것이고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200위안 가까운 금액의 본전 각이 간절해 조금 무리하게 되었다. 식빵과 함께 베이컨, 쏘시지, 계란후라이, 샐러드 등을 비롯한 일반 아침메뉴를 비롯해 스테이크, 초밥, 볶음밥, 소바까지 누가보면 며칠 굶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게 먹었다. ^^ 형도 나에게 전염됐는지 오늘만큼은 의외로 큰 접시로 세번이나 음식을 나를 정도로 과식하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후, 형은 곧바로 바둑판 앞에 앉아 최종 승부를 준비했다. 알려졌다시피 농심辛라면배는 제한시간 1시간인 준속기기전이다. 삼라만상의 변화가 가득한 바둑을 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다. 따라서 하루나 이틀 전에 대국을 준비할 때는 다른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제외시키고 오직 한가지에 열중할 수 밖에 없다. 흑을 잡았을 경우 어떻게 포석을 전개시키느냐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익숙한 길이기에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만약 절묘한 신수라도 찾아낸다면 상대를 당혹하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아니 거의 승리 고지를 향한 7부 능선을 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6회 대회 5연승 신화의 대미를 장식한 최종국, 왕시(王檄) 5단과의 대국이 좋은 예다. 형은 중국선수인 왕레이(王磊) 9단이 이틀 전에 들고나와 패배했던 포석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오히려 최종국에서 왕시 5단에게 역으로 사용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 바 있다. 게다가 약간 수순을 비틀고 시간공격까지 겸해 결국 초반부터 쭈욱 밀어버린 완승국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관점에서 형은 초반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약 30수 정도의 수십가지 그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혹시 백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인 포석을 기억하려 했고, 곳곳에 묻혀있을 수 있는 예측불허의 돌발수에 대한 피해의 최소화를 준비했다. 이미 최종국을 대비한 승부호흡은 시작됐다.
[세가지 시나리오] 오늘은 중국과 일본의 주장전이 열릴 예정이다. 중일 최후의 보루인 쿵제(孔杰) 7단과 요다노리모 토(依田紀基) 9단은 침착하고 견실한 기풍으로 신구(新舊) '이창호 천적'으로 불린 바 있는 껄끄러 운 상대들이다. 그나마 조한승 8단의 고군분투로 둘 중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는 사실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최종라운드가 시작되기 전 형과 세가지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첫번째는 조한승 8단이 나머지 세 선수들을 모두 이겨 한국의 우승을 확정짓는 경우로 형은 비록 대국이 없어 상하이에 온 보람은 못느끼겠지만 심적으로 가장 바라는 경우라고 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상금이 훨씬 큰 개인전보다 농심辛라면배(단체전)를 우승하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단체전에 임하는 심적 무게가 얼마나 버거운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두번째는 조8단이 한번만 이기고 지는 일, 이미 현실로 눈앞에 펼펴진 시나리오이다. 누구를 상대하느냐만 달라질 뿐 최종국 출전이 확정적이므로 하루의 쉬는 시간동안 컨디션 조절에만 집중하면 된다. 어차피 일정량의 책임을 떠맡아야 할 주장이기에 이 정도 부담은 적절한 수준이라는게 형과 나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최악이랄 수 있는데 바로 조한승 8단이 두번을 이기고 지는 경우이다. 얼핏 주장의 1승만 첨가되면 우승확정이라는 면에서 두번째와 비슷하지 않을까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최종국에 임하는 주위의 배경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조한승 8단의 마지막 대국을 지켜보는 형은 승리도 패배도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에서 맞는 패배이기에 마음을 다잡고 최종국을 준비하기에는 하루라는 시간이 부족할 수 밖에 없고, 뿐만 아니라 조8단은 이미 3승으로 할당량을 훨씬 뛰어넘는 활약을 했기에 주장으로서 일련의 팀원들의 노고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꼭 우승(농심배는 우승팀에게만 상금이 지급됨)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기세와 당일 컨디션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마인드스포츠'인 바둑이기에 이같은 상황은 최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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