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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스토리

다시보는 농심배6/ 초반에 발발한 대형전투

동생 영호가 직접쓰는 이창호 스토리6

2007-03-14 오전 11:33:03 입력 / 2007-03-14 오전 11:53:56 수정

[최후의 준비를 마치고]

어제 잠을 설쳤는지 늦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를 넘 어섰고, 형은 언제 일어났는지 바둑판 앞에 앉아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형은 내가 일어난 모습을 보자 아침을 걸러 배가 고프다며 간단하게 라면을 먹고 싶다고 했다. 주최측에서 각 방에 배치해 둔 작은컵 크기의 '辛라면', 그리고 베이징에서 조달해 온 북한산 김치와 함께 조촐하게 아침을 차려줬다. 형은 북한산 김치를 좋아한다. 젖깔 및 갖은 양념으로 화려한 맛을 낸 남한의 김치보다 배추 자체의 맛과 깊은 숙성에 치중한 북한김치가 훨씬 담백하고 맛깔진다고 했다. 기름지고 화려한 맛을 내는 중국요리보다 담백하고 깊은 맛을 내는 한국요리를 더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오늘 대국은 오후 1시부터이다. 이전의 대국보다 1시간 앞당겨졌는데, 결과까지 생중계로 방송하겠다는 주최측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사실 바둑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방송시간에 부정확성이다. 바둑전문TV가 아닌 이상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뒤에 순서를 기 다리고 있는데, 바둑경기의 예상종료시간을 어림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예를들어 제한시간 1시간인 농심辛라면배는 일반적으로 3시간이면 끝나야 하지만, 패나 초읽기 같은 복잡한 바둑룰에 제대로 걸리면 5시간을 넘기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이나 중국이나 막 클라이막스에 접어든 순간에 '정규방송관계로 이만 마칩니다'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바둑이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인데, 잉(應)씨배 룰처럼 일정 시간을 주고 이를 어겼을 경우 벌점을 매기는 완곡한 방법, 혹은 가끔 중국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어진 시간을 넘기면 무조건 시간패를 시키는 극단적인 '타임아웃제' 등이 그 대안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시간 제약들이 바둑의 질 자체를 떨어뜨릴 수 있고, 또한 부정한 요소가 승부에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형은 아침을 늦게 먹어 점심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안먹을 수도 없었다. 대국은 오후 1시 시작인데 길어지면 5-6시까지 갈 수 있고, 미세한 장기전 싸움으로 발전하면 종반에 허기져서 제대로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30분, 한국기원 직원에게 소개받은, 걸어서 7분 거리의 퓨전레스토랑에 갔다. 그리고 점심세트메뉴로 되어있는 카레라이스와 새우볶음밥을 포장해서 들고왔다. 그런데 형은 소화기관이 좋지 않은 데다가 최종국을 앞둔 긴장감 때문인지 거의 먹지를 못했다. 반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남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음식 남기면 죄 받는다'는 과거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내가 다 먹어치웠다. ^^

식사를 마치고 형은 마지막으로 유력한 포석을 몇개 놓아본 후, 와이셔츠를 걸쳐입었다. 그리고 터질 듯한 긴장감을 세면으로 씻어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출전 준비를 했다. 이제 5분만 지나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그토록 기다려왔던 요다노리모토 9단과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는 국가대항전 최종수문장의 자격으로 최후의 일전을 펼치게 된다. '모사재천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했다. 이제 무대는 만들어졌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초반 발발한 대형전투]
대국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된 듯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요다노리모토 9단은 일본의 정신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전통 의상인 '와후쿠(和服)'를 입고 나와 자리를 지켰고, 짙은 눈썹 아래의 매서운 눈빛으로 바둑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칼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고, 한 손에 움켜쥔 부채에는 일본기사 특유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실제 본적은 없지만 과거 목숨을 걸고 수많은 전장터를 누빈 백전노장의 모습이 이러지 않았을까. 아무튼 외적인 모습과 행동, 내적인 성격이나 사고, 어느 것을 보더라도 형과는 극을 이루는 사내였다.

입회를 맡은 왕루난(王汝南) 중국기원 원장의 지시에 따라 돌을 가렸다. 흑을 잡기만을 간절히 원했는데 안타깝게도 결과는 백이었다. 준비한 많은 노력들이 빛을 바래는 순간이었다. 어제 상식을 뛰어 넘는 역전승에 이어 오늘 흑을 거머쥔 것까지, 역시 요다 9단은 하늘이 내려준 천적인 듯 행운의 여신까지 함께 했다. 형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쉽지 않은 승부임을 직감했고,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 오후 1시, 드디어 왕루난 원장의 대국개시 선언으로 제7회 농심辛라면배 최종국이 시작됐다.

바둑판에 구멍이라도 내듯 내려찍는 요다 9단과 위에 살며시 얹는듯 다소곳한 형의 착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실리를 좋아하는 요다 9단과 두터움을 좋아하는 형, 모두 자신의 입맛에 맞게 포석을 펼쳤다. 요다 9단은 대각선 소목진을 펼치며 준비한 그림을 펼쳐냈고, 형은 화점으로 응수하며 기나긴 승부를 준비했다. 시간안배에 신경쓰듯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40수까지 진행된 초반은 발빠르게 요소요소를 차지한 요다 9단과 느리지만 두터움을 간직한 형이 잘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였다. 누구의 우세도 점칠 수 없는 서로의 특징들이 잘 녹아든 포석이었다.

고수들은 응수타진에 능하다. 특히 형이 가끔 한번씩 던지는 응수타진성 쨉은 앞으로의 전략과 전술에 큰 방향성을 제공해줄 정도로 교묘하고 날카롭기로 유명하다. 형은 순조로운 흐름에 돌연 한칸 뛴 흑의 사이를 들여다보는 수를 던졌다. 그러나 당연하게 이어줄 줄 알았던 요다 9단은 반발하며 싸움을 유도했다. 요다 9단의 반발로 형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기세를 이어나가 끊고 싸울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한발 물러서며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피같이 귀중한 시간을 하염없이 흘러보냈다. 장수는 한번의 결정에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므로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결정이 내려졌는지 형은 돌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들여다 본 사이를 뚫으며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선택권을 넘겨받은 요다 9단 역시 필연적인 수순으로 장고가 이어졌다. 만약 여기에서 싸움을 회피하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지만 기세에서 꺾이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전장이 끝날 때까지 만회를 위해 고전분투해야만 한다. 반면 강경책으로 싸우자니 정확한 수읽기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형이 상당한 장고 끝에 선택한 강경책이기에 분명 상대에게 유리한 싸움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형의 선택이 정확한 수읽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를 가장한 허위인지를 밝혀내야만 한다. 이 모든 열쇠는 자신의 수읽기에 달려있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치밀하고 정확한 수읽기를 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무쌍하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가능한 변화 하나를 망각한다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할까. 끝을 알 수 없는 장고가 이어졌다. 아마도 주어진 시간의 절반 이상은 사용한 것 같다. 그리고 내려진 요다 9단의 선택, 형과 마찬 가지로 초강경책이었다.

한일의 두 영웅은 돌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함께 건넜다. 어느 한 쪽은 치명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만 했고, 누구의 수읽기가 더욱 정확하느냐에 달려있었다. 대국자들은 시간에 쫓기면서도 정확한 수순을 쫓아야 하는 이중고가 이어졌지만, 반면 검토실의 기사들은 뒤가 없는 싸움을 펼치는 두 기사들 의 상황을 재미있어 했다. 검토실의 루이나이웨이 9단은 조한승 8단과 함께 다양한 변화도를 만들어 냈다. 전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루이 9단이었지만 선뜻 누구의 유불리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가끔은 한국검토진의 루이 9단이 의견을 내면 중국검토진의 창하오 9단이 와서 반박하는 식으로 공동연구도 이뤄졌다.

양 검토진의 의견을 수렴한, 정답에 가까운 변화도가 나왔다. 서로 최선을 다해 둔다면 결국 3패가 나온다고 했다. 물론 3패가 나온다면 농심辛라면배 역사상 최초의 무승부 대국으로 기록될 것이고, 공동우승이 아닌 이상 다음날 다시 승부를 가려야만 한다. 조금만 실족해도 어느 한 쪽이 부러져야 하는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과정이 싫어서인지 내심 3패빅을 바라고 있었는데, 실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형의 다음 수를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멈춰서는 느낌이었다. 수읽기에 착오가 있었는지 호구를 쳐야하는 장면에서 곱게 이으며 이미 검토실 레이더에 걸린 한수 부족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었다.

TYGEM / 이영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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