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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생 사범, 저 세상에서도 수담을 즐기시오'

한상대 교수, 오송생 9단 추모글 남겨

2007-12-28 오후 4:22:02 입력 / 2008-01-25 오후 4:53:08 수정

1989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객원기사로도 활동한 바 있는 중국의 오송생 9단이 2007년 12월 23일에 별세했습니다. 오송생 9단과 친구로 혹은 사업자로 오랜시간 함께 지내던 한상대 교수가(한상대의 지구촌 바둑 기행-바로가기) 비보를 접하고 오송생 9단 추모글을 보내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은 호주 한인 바둑계의 대부가 된 최해택 화백이 어제 시드니에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가 연말 인사 전화를 한줄 알고 웃으며 그에게 호주 소식을 묻고 있는데 최화백 목소리 낌새가 이상하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지난 일요일에 오송생 사범이 돌아 가셨어요” 한다.

오송생 9단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나로서는 너무 충격이었다. 최화백은 “미망인 부탁인데 한상대 교수님과 윤기현 9단에게는 직접 전화로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고 한다. 나는 최화백에게 윤국수에겐 내가 알린다고 하고 어제 윤국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최화백은 20여년전 내가 한인바둑회장일 때 총무를 맡았고 내가 귀국한 후 그는 여러 차례 한인 바둑회장을 지내며 나 보다 훨씬 훌륭하게 회장직을 치러 낸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내가 한국에서 바둑팀과 호주를 방문할 때마다 교류전을 주선하고 직접 본인이 붓 글씨로 플랜카드도 만들어 달아 주곤 한다.

1982년이니까 벌써 25년 전이다. 시드니대학에서 열린 바둑 대회에 참가해 앉아있는 나에게 쪽지가 전달되었다. “대국이 끝나고 잠깐 만나고 싶습니다." 중국 총영사가 보낸 것이었다. “중국 총영사가 나를?”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은 국교 수립 전이라 중공은 적성국가이었고 시드니에만 20만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총괄하는 막강한 중국 총영사가 바둑대회까지 와서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무언지 감이 전혀 안 잡힌다.
“혹시 총영사배 바둑대회를 열자는 얘기인가?” 그렇더라도 나에게 중국 총영사관으로 와 달라고 하면 얼른 갔을 텐데… 나는 서둘러 바둑을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대회장 밖 잔디 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중국 총영사와 악수하는데 옆에 수행원 한명 외에도 나이 먹은 부인 한명과 한 젊은이가 서 있다. 모두 다섯 명이다. 총영사가 나에게 한문 이름을 하나 보여준다. 吳淞笙. 내가 ‘오척생’ 하고 읽었다.
오송생을 오척생이라고 읽은데는 이유가 있다. 내 초청으로 1980년대에 호주를 다녀간 김재구 8단과 중국 바둑계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중국 9단들 이야기가 나왔다. "총 3명이 있는데, 진조덕, 섭위평 그리고 이 한자가 뭐죠?"하고 중국 바둑 잡지에서 吳淞笙을 보여 주니까 그가 자신 있게 '오척생'하고 읽었던 것이다. 김재구 9단은 당시 한시(漢詩)를 즐겨 짓고 있어 한자 실력이 나보다 상수라고 굳게 믿었기에 내 머리 속에 '오척생'을 그대로 입력했다. 그런데 중국 총영사는 '우쑹썽'이라고 다른 발음을 한다. 그제서야 ‘송’ 자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오송생 9단의 이름은 안다고 하자 중국 총영사가 “이 부인은 오송생 9단 어머니이고, 그 옆 사람은 오9단 동생입니다”라고 소개해 준다. 그들은 나에게 겸손하게 허리를 여러 번 굽혀 인사를 한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통해 오9단 동생이 중국에서 성악을 전공했는데 호주에는 침술사로 이민을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직계 가족이기 때문에 호주에 올 수 있었지만 형인 오송생 9단은 이민을 거절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민을 거절당한 오9단은 호주 바둑협회 초청을 받아 다시 호주 이민성에 신청을 해달라고 했단다.
당시 호주 바둑협회장인 스마이스 교수가 자기에게 찾아간 이 일행을 나에게 보낸 이유는 내가 당시 호주바둑협회(AGA) 국제담당 이사이기도 했지만, 내 아내가 연방정부 이민관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걸로 나는 짐작했다.

결국 내가 초청장을 쓰고 집사람이 옆에서 도와 오송생 9단은 호주로 이민을 올 수 있었다. 나를 처음 찾아 온 오9단은 키가 크고(183cm) 눈썹이 짙은 북부 중국인 골격이었다.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순하다. 그는 승부사 보다는 예술인 쪽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호주에 이민을 온 오9단은 한동안 한판에 20달러를 받으며 개인 지도를 했다. 지도대국으로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여의치 않아 부인은 공장에 다녔다. 오송생 9단 부부에게는 팸이란 예쁜 딸이 있었다. 그들은 이민을 와 고생을 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오9단은 나에게 중국에서는 자식을 한 명 밖에 낳지 못하게 하는데 호주에서는 가능하니까 아들을 낳는 게 꿈이라고 했다. 결국 호주에 온지 얼마 안되어 아들을 낳았다. 오9단은 기뻐하며 자기 아들 이름을 호주식으로 브라이언(Brian)이라고 지었다.

당시에 나는 시드니에서 내륙으로 300km쯤 떨어진 캔버라에서 문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기차를 타고 나를 찾아 왔다. 이유는 바둑을 두고 싶은데 적수가 없어 호주챔피언인 나를 찾아 왔다고 했다. 우리는 3일을 계속 바둑만 뒀다. 치수 내기를 두었는데 나는 주로 두 점에서 네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오9단은 관광 할 생각도 별로 없는 듯 했다.
나는 속으로 “프로 기사도 바둑을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구나”고 놀랬다. 한번은 대국 중 내가 비발디의 4계를 배경 음악으로 틀었는데 나에게 음악이 아주 좋다며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에게 그 음악을 녹음해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나는 시드니대학 교수가 되어 오9단과 같은 도시에 살게 되었다. 자연히 그가 우리 집을 찾는 회수가 많아 졌다. 그러다가 1986년 호주바둑대회가 타스마니아(Tasmania)란 섬에서 개최되었는데 나는 중앙일보 박치문 위원과 서봉수 9단을 초청했다. 그런데 오9단이 '시풍쑤'가 온다며 나보다 더 좋아한다.

타스마니아에서 5일간 계속된 바둑대회 옆 방에서는 서봉수-오송생의 한•중전이 열리고 있어 관전자들을 즐겁게 했다. 오9단이 앞서 가며 전적은 2대2가 되었다. 한국의 2인자란 사람이 오9단에게 밀리는 듯 했다. 거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오9단은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다이찌(太極拳)와 명상을 하며 최상의 컨디션으로 대국에 임했던 것이다. 대국 중 오9단이 계속 중국차를 마시고 있었던 일이 특히 인상에 남는다. 이에 반해 바둑을 잊고 쉬고 싶어서 호주에 온 서봉수 9단은 새벽까지 그 근처 카지노에서 놀다가 돌아와 늦잠을 잤다. 서9단을 깨우는데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글로 차마 밝힐 수 없는 비상수단을 써야만 할 때도 있었다. ^^ 그러나 대국 결과가 2대2가 되자 서봉수 9단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5국은 정말 열심히 두어서 이긴다. 그런데 서봉수 9단과 둔 5번기가 오송생 9단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됐다.

대회가 끝나고 시드니로 온 후에 하루는 오9단이 나를 찾아 오겠다는 전화를 했다. 나는 대학 근처 전철역에서 오9단을 만나 내 연구실로 데려왔다. 그가 주위를 한참 보더니 갑자기 나에게 “교수십니까?” (Are you a Professor?) 하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왜 자기에게 내가 교수란 얘기를 안했느냐고 한다. 그래서 내가 지난 3년 동안 왜 내 직업을 한번도 묻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내가 좋은 차를 타고 다녀서 사업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 얘길 들은 우리 집 사람이 가슴을 치며 “아이고~ 이 답답한 바둑쟁이 양반들아”하며 마구 웃는다. 우리는 만나서 바둑 얘기로만 3년을 보낸 것이다.

집으로 온 오9단과 나는 대화를 하며 그가 바둑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물 떠난 고기 같았다.
“오9단이 한국에 가서 기사 생활을 해 볼 생각이 있으면 내가 한국기원 측과 얘기를 해 보겠다.” 라고 하니까 그는 심각해 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 한다. 그가 나에게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는 나를 한인들이 많이 사는 애쉬필드(Ashfield) 어느 중국집으로 초청했다. 나에게 가족을 꼭 데리고 나와 달라고 한다.
예약해 둔 중국집에 가니까 상이 미리 차려져 있는데 음식이 너무 많다. 내가 오9단에게 “오늘 저녁 값을 내가 낸다면 먹겠지만 오9단이 낸다면 절대 안 먹겠다” 고 우겼다. 그의 수입으론 너무 부담이 큰 걸 알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주인을 데려온다. 주인이 나에게 오9단은 자기 친구인데 자기가 먼저 제안을 해서 우리 가족에게 한턱 쏘기로 했다며 아무 걱정 말고 음식이나 즐겨 달라고 한다.

식사 중에 오9단이 나에게 자기가 한국에만 갈 수 있다면 '제2의 프로기사 인생을 살아 보고 싶다'고 한다. 자기가 재미있는 수(手)를 가끔 두기 때문에 한국 기사들도 흥미있어 할 것 이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당시 한국기원 정상태 사무 국장에게 전화를 했다.
정국장은 “저는 찬성하지만 다른 기사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니까 시간을 좀 주십시오.” 한다. 호주 최강 젊은 왕우비도 너무 한국에 가고 싶어 하길래 같이 신청을 해 주었다. 얼마 후 정국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오9단은 좋은데 왕우비는 지명도가 없어 제외 되었습니다. 오9단과 함께 한국에 한번 나오십시오” 한다.

나는 오9단을 만나 2주간 봄방학(그 곳은 10월)을 하는데 그 때 한국에 같이 갈수 있냐고 물었했더니 ‘있다’고 한다. 나는 오9단과 한국에 도착한 후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프로기사들과 대국을 주선해 주었다. 그 외에도 충암연구실에서 이성재, 윤성현 9단을 비롯, 압구정동 현대기원에서 김종수 9단과 대국을 하게 하는 등 닥치는 대로 바둑인이 모이는 자리면 오9단을 동행하고 가서 대국을 주선해 주었다.
당시 아마추어였던 김종수 9단이 선으로 반면 세집을 남기자 오9단은 “한국 아마추어가 아주 세다” 라며 놀란다. 나는 2주가 지나자 개학 때문에 호주로 돌아 갔고 오9단은 주위 권고대로 얼마 동안 혼자 한국에 남겨 두었다. 그 때 그는 김인 9단, 윤기현 9단 등의 도움도 받고 친해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특히 윤9단과는 아주 친해져 바둑을 많이 두면서 가까이 지냈다.

오송생 9단은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받아들여 졌다. 나는 호주에서 중앙일보 박치문 위원에게 오송생 9단에 관한 글을 보냈고 당시 신문에 내 글이 다음과 같이 기사로 났다.

서울에 이사온 오9단 가족은 심한 문화 충격에 시달리게 된다. 우선 딸 팸이 연희동 중국학교에 다니는데 유일하게 대륙에서 온 학생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가진 돈이 없는 오9단은 집도 신촌 근처에 주위의 도움으로 월세를 든 걸로 나는 알고 있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 돈이 떨어지기도 했다. 바둑계 일부에서는 나에게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외국 사람을 한국까지 데려왔으면 AS까지 해야 하는 거 아냐?" 대개 이런 내용이다. 나는 나대로 가족과 다른 나라에 갈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그 항공료로 한국에 오고 용돈도 써가며 애를 썼기 때문에 칭찬을 기대했는데….

이 무렵 오송생 9단의 가정 불화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부인은 적대적인 한국과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견디다 못해 호주로 애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오9단은 한국을 택해 혼자 남았다. 나는 방학 때만 한국에 와서 오9단을 만났다.
하루는 법원 건너 한일바둑이란 곳에 오9단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근처 중국집에 들어간 오9단이 나에게 이혼 의사를 비친다. 놀란 내가 일시적 현상이니 더 참아 보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자기는 닭띠인데 부인이 (내 기억으로는) 호랑이 띠인가 된다고 했다. 이 부부는 결국 이혼을 하고 만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오9단은 밖으로 별로 티를 안내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하루는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오9단이 묻는다.
"수유를 좋아해?"
“수유가 뭔데”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는 오9단에게 나도 반말을 했다.
“소고기 수유 잘 하는 집 있어, 내가 사 줄게”
“아, 수육. 좋지”

우리는 한국기원 근처에 있는 수육 집에 앉았다. 나는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많이 가르치는데 중국인은 한국말을 좀 하게 되면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고 서양사람은 애들에게도 존대를 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모른다. 언젠가 연구를 해 봐야 할 문제다. ^^

술 한잔 하더니 오9단이 당시 4인방 기풍을 얘기 한다.
(자기 손바닥으로 다른 손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는 모습을 하며) “조훈현은 가볍다” 고 한다.
(주먹을 쥐고 다른 손바닥을 누르며 돌린다) "서봉수는 이렇게 두어”
"이창호는 참고 기다려 바둑이 정확해"
"유창혁은 판 전체의 급소를 짚어 오며 서서히 압박해 와”
“질로는 유창혁 바둑이 최고야, 순금이야.” 한다.

나는 오9단이 유창혁 팬인줄 몰랐었다. 내가 이 얘기를 유사범에게 하니까 “정말 그랬어요?” 하며 웃는다.

1996년에 한국에 귀국한 나는 처음에 평창동 근처에 살았다. 어느날 오9단이 나에게 전화해서 근처 올림피아 호텔에 있으니까 만나자고 한다. 가 보니까 바둑계 아는 얼굴들이 많고 무슨 국제대회 전야제이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오9단이 웃으며 “여기서 저녁 먹어, 맛있어” 한다.
“내가 저녁 얻어 먹으러 온 사람 같잖아, 창피하게 나를 왜 불러 냈어?”
“안 창피해, 먹어”

6~7년 전인가 오9단이 나에게 사진을 한 장 보여 준다. 젊은 여자인데 키도 크고 세련되어 보여 모델 같다. 내가 누구냐고 하니까 “내 와이프 될 사람입니다”라고 존대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오 9단은 존칭을 섞어 쓰고 있었다. “하얼빈 여자인데 결혼을 한번해서 딸이 하나 있습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이 차이가 20살 이상으로 기억한다.

그후로 오9단이 나에게 사업관계로 연락하고 사람들을 소개 받기도 했으나 자주는 못 만났다. 그리곤 어느날 중국 청도에 바둑학교 교감으로 간다고 하며 나에게 작별인사를 왔다.
청도에서 살다가 오9단은 새로운 가족과 함께 다시 호주로 갔다. 작년에 내가 내 바둑영어 교실 팀 10여명과 호주에 갔을 때 바둑교류전이 열릴 클럽에 갔다. 거기에는 오9단이 넥타이까지 메고 나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누가 나에게 “두 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셨어요” 한다.
그는 젊은 부인과 같이 나와서 부인을 인사 시킨다. 평소에는 바둑클럽에 안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오9단한테만 특별히 있었던 독특한 낭만적 분위기가 잘 안 보인다. 어딘지 힘이 없어 보이고 생명력이 없어 보였다. 나에게 한문으로 쓴 얇은 바둑책 몇 권을 주며 자기가 최근에 쓴 것이라고 한다.

금년 5월에 호주 바둑 모임에 갔는데 오9단이 안 보인다. 안 나올 리가 없는데 이상해서 물어 보니까 신명길 한인 바둑회장이 나에게 “모르셨어요? 작년 말에 심장 마비를 일으켜서 건강이 아주 안 좋으세요” 한다. 내가 단체 인솔자만 아니면 집에 찾아가 보겠는데, 다음 기회에 방문하지 속으로 생각하며 호주를 떠났다. 이렇게 비보를 듣고 나니까 “그 때 무리해서 병 문안을 갈 걸.” 후회가 된다. 오송생 9단 장례식은 12월 31일로 잡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조문단이 오기 때문에 장례식을 뒤로 미뤘다고 한다.
오송생 사범, 저 세상 가서도 그 좋아하는 수담을 즐기시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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