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바둑의 영원한 일꾼 제주바둑협회 박영수 고문
지난 주말, 겨울이 채 문턱을 넘어오지 않았던 제주에서 전통의 제주도왕위전이 열렸다. 비록 지역대회라고는 하지만, 중도에 끊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거의 50년이 되어가는 유서 깊은 기전이었다. 유서 깊은 제주도왕위전에서 오래된 포도주처럼 반가운 오랜 바둑 벗을 만났다. 바둑계에 조금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분 중에 제주도바둑협회 박영수(69) 고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1990년부터 10여 년간 제주바둑을 이끌어온 제주바둑의 산 증인이다. 사람들은 그를 '박원장님'이라고 불렀다. 과거 한국기원 제주지원장을 오래토록 맡았기 때문에 굳어진 이름이다. 박영수 원장은 우리 나이로 70세로 제주도바둑협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고문'보다는 '상임'에 방점이 찍힌다. 아직까지 제주바둑계에서는 그의 손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IMF의 파고를 넘지 못하며 부침을 심하게 겪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 제주바둑의 역사들. 고만수 제주도바둑협회장, 김석범 제주 노국수, 박영수 고문.
어언 40년을 넘긴 제주도왕위전을 떠올리니 그 역시 많은 관련이 있었다. 1990~2002년까지 한국기원 제주지원장을 맡았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제17기 제주도왕위전을 8년 만에 부활시킨다. 그 이전까지 제주도는 작은 지역대회 하나 없는 바둑불모지였고, 그를 뒷받침할 변변한 조직도 없던 때였다. 박원장의 추진력 하나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당시 그는 백록기우회장의 자격으로 주최사 제주신문을 찾았다. 재정문제는 본인이 책임질테니 대회를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개 기우회의 명칭보다는 한국기원의 명칭이라면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길로 서울 한국기원으로 올라가서 여러 제반요건을 갖추고 곧장 한국기원 제주지원을 차려 제주왕위전을 바로 부활시켰다. 또한 이듬해 제주지사와 만나 제주시장배도 거침없이 만들었다.
18세 때 9급 친구에게 25점을 접히며 바둑에 입문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가 다니던 기원에서 9급 이상의 기객들을 모아서 바둑대회를 벌였다. 입문 3개월의 박원장은 9급도 안되면서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데 일이 되려니, 운 좋게 준우승까지 덥석 해버린 것이다. 일에 대한 추진력이나 한 가지에 필이 꽂히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불도저 성품이 바둑을 대함에도 그대로 나타났던 것.
1969년 제주도왕위전 2회 대회부터 준비와 진행을 도맡다시피 한 그가 제주지원장을 은퇴하려고 할 때였다. 제주인의 바둑사랑을 실천한 공로로 당시 우근민지사가 자신의 공관을 내주며 은퇴식을 열도록 배려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제주바둑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 제주도왕위전을 참관하기위해 대회장을 들른 '여의도 바둑왕' 강창일 의원과 박영수 고문의 친선 대국중.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를 이어오면서 한국바둑은 들불처럼 일어난다.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이창호의 등장, 4인방 시대의 도래 등 빅 이슈, 뉴 이슈가 나날이 등장했다. 그와 더불어 당시 바둑세계의 변방, 불모지에 머물러 있던 제주도가 국내도전기의 메카, 국제기전의 중심무대로 각광받게 된다.
1990년대 초 제주에서는 각종 국제대회가 자주 열렸다. 외국 프로들에게 보여주어 부끄럽지 않을 대국장을 찾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때문에 국제도시 제주는 국대급호텔들이 즐비하고 자연풍광까지 훌륭하여 천혜의 대국장으로 적임이었다. 따라서 초기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등 거의 모든 세계대회와 박카스배 명인전 등 유수의 국내기전도 덩달아 제주행이었다.
더불어 제주바둑은 그때부터 깨어나기 시작했고 활황을 이어갔다. 제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국 17개시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아서 바둑 붐도 보잘 것 없는 곳이지만, 일당백의 바둑후원만큼은 가위 국보급이었다. 그런 한 가운데에 위치했던 사람이 바로 박원장이었다.
바둑후원자라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고 그 못지않게 열정이 있어야 한다. 비록 하나는 흡족하게 갖추진 못했으나, 다른 하나 열정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제주를 찾은 기사들에게 쾌적한 대국장은 물론, 잠자리, 먹을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 등을 제공해주며 그들에게 제주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었다. 또한 그것이 한국을 돋보이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조훈현 조치훈 이창호 우칭위엔 린하이펑 네웨이핑 마샤오춘 루이나이웨이 요다노리모토 등 당시 국제적인 인물은 거의 다 제주도와 박원장의 추억이 있을 정도다.
▲ 1992년 5월 우칭위엔과 린허이펑 사제를 초청하여 제주그랜드호텔에서 가진 간담회 장면이다. 왼쪽부터 박영수, 김영성(부산), 윤기현, 우칭위엔, 린하이펑.
한국기원 제주지원을 맡으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1992년 고인이 된 우칭위엔과 그의 제자 린하이펑 부부를 초청한 일이란다. 한국기원 이사로 있던 고 김영성 씨는 열렬한 우칭위엔의 팬이었다. 김영성 씨가 우칭위엔을 부산으로 초청할 의사를 비치자, 박원장은 제주 체류경비를 책임지겠다고 하여 공동 초청으로 일행이 제주에 왔다. 당시 경찰의 사이드카 경호를 받도록 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고. 아마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이후로 첫 바둑인에게 대한 사이드카 경호였다.
"제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사업실패를 했을 때 고 김영성 이사님은 저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조(훈현)국수도 평생 고마워할 분입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두 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까지 바둑계에 머물고 있는 지도 모르죠. 하하."
돈을 잃었어도 사람은 잃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국수는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궁금했다.
"돈이 돌지 않으면서 흑자부도가 났지요. 본의 아니게 부도수표를 발행하게 되었고, 급기야 1억 정도를 메우지 못해 부득이하게 영어의 몸이 되었죠.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때 조국수가 제주검사장 차장검사 등을 만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더군요. 당시 설날을 이틀 앞두고서 제주행 비행기 표도 구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직접 내려와서…"
▲ 제주도바둑협회의 두 어른. 박영수 고문과 고만수 회장.
분위기를 바꾸는 의미에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달라고 하자 금세 표정이 밝아지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1993년 4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제주를 방문했어요. 당시엔 취임하고 나면 지역을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때 서귀포하얏트호텔에서는 이창호-조치훈 간 동양증권배 결승1,2국을 치르고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에서 세기의 대결을 대통령이 구경하고 싶다고 한 거예요. 마침 호텔노조가 파업 중이었는데, 대통령이 온다고 하자 더욱 꽹과리 징소리가 드높아져서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때 제가 다급한 마음에 노조위원장과 멱살을 잡고 로비를 뒹굴었지요. 결국 무난히 경기를 진행했지요. 덕분에 대통령은 발길을 돌리고 말았지만. 하하"
1969년도부터 시작된 그의 바둑사랑이 어언 50년간 바둑에 젖어 살았던 박영수 원장은 제주바둑을 위해 넓은 멍석은 깔았다. 그의 소원은 바둑이 인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기에 제주도에 바둑 붐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것뿐이란다.
"20여 년 전에 비해 바둑 인구가 저변이 약해진 것 같아 안타까워요. 다만 제가 인맥은 쌓아놓았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원해주려고 하죠.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바둑행정에도 관여하고 장차 학원스포츠로서도 바둑이 정착하길 바라는 맘이죠. 제가 20년 전부터 역설했지만 바둑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진정한 스포츠로 거듭 나야 합니다."
박영수 제주바둑협회 고문의 제주지원장 시절(1990~2002) 주요업적
1990년 제주도 왕위전 부활, 백록배 전도바둑대회 개최
1991년 우칭위엔 린하이펑 부부 초청 행사
1993년 동양증권배 조치훈-이창호 전 유치
1993년 응씨배 오다케-서봉수 전 유치
1995년 제주시장배 시민바둑대회 창설 주역
2001년 제주도지사배 바둑대회 창설 주역
박카스배 명인전 등 각종 도전기 유치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응씨배 등 각종 세계기전 유치
일본 3대 기전 도전기 유치
▲ 강창일 의원, 홍무진 프로, 박영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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